영국 노동자들은 왜 탈퇴를 택했나
유럽연합 가입에 따른 수혜에서 소외
혜택은 일부 지역, 소수 부자들의 몫
“주식시장에 넣어둔 돈 한 푼도 없어요. 그게(브렉시트 부작용이) 나한테 뭐라고?”
영국 잉글랜드 북동부 해안 도시 선덜랜드의 은퇴한 건설노동자 켄 워커(59)는 27일 미국 <뉴욕 타임스> 기자한테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로 잃을 게 없는 노동자 계층의 정서를 대변했다. 영국에서 ‘브렉시트’ 결정을 후회하는 여론이 높다는 주류 언론의 보도가 쏟아졌지만, ‘탈퇴에 투표하라’는 포스터가 여전히 붙어있는 펍에 앉아 생맥주 1파인트(0.568리터)를 마시고 있던 이 은퇴 노동자와 한때 잘 나가던 노동자의 도시 선덜랜드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인구 27만3000명의 선덜랜드는 23일 개표 초반 ‘브렉시트 찬성 61.3%, 반대 38.7%’라는 결과로 전세계를 놀래킨 도시이기도 하다.
1988년 마거릿 대처 총리는 선덜랜드를 포함해 영국 북동부 위어강 일대 조선소들을 폐쇄했다. 유럽연합은 대처 행정부가 조선소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비용 가운데 4500만파운드를 지원했다. 선덜랜드에서는 유럽연합의 면세 혜택을 바라보고 이 지역에 공장을 세운 닛산 자동차가 일부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대처 정부 때 입은 일자리 타격을 회복하지 못했다. 현재 선덜랜드의 실업률은 9%대로, 영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지게차 오퍼레이터인 마이클 웨이크(55)는 한때 조선소 그을음으로 검었던 로커 해변을 바라보며 “모든 산업이, 모든 게 사라졌다. 우리는 힘이 세고 강했다. 하지만 브뤼셀(유럽연합 본부)과 정부가 모든 것을 가져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켄이나 웨이크 같은 처지의 노동자 계층에게 브렉시트로 인한 금융시장 파동은 유럽연합 체제에서 떼돈을 번 ‘남동부 일부 지역의 일’이거나 ‘소수 부자들의 일’일 뿐이다. 오히려 브렉시트가 자신들에게 돌파구를 마련해 줄 거라는 기대감도 번져 있다.
선덜랜드의 플로리스트 마리아 타일러(58)는 “이미 더 나빠질 것도 없다”며 “브렉시트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퇴한 군 정비기술자 에드워드 페날(64)도 탈퇴에 표를 던진 걸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브렉시트로 인한 시장의 불확실성을 “유언비어”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나는 (닛산이 브렉시트로 선덜랜드와의) 관계를 끊을 거라고 보지 않는다”며 “파운드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런 정서는 비단 선덜랜드만이 아니다. 프리랜서 여행 작가인 마이크 카터는 27일 <가디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지난 5월 한달간 리버풀에서 런던까지 340마일을 걸어 보니, 브렉시트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카터가 여행하면서 본 영국 남동부 부자 도시들과 북서부 가난한 도시들은 ‘다른 나라’였다.
전세계 251개 은행이 모여있는 코스모폴리탄 런던에는 방 두 개에 100만파운드가 넘는 고가 부동산이 널려 있으며, 럭셔리한 가구 등을 파는 상점이 즐비했다. 그러나 북서부 도시들을 걸을 땐 거리에 온통 창문이 깨진 건물과 전당포, 대부업체, 베팅숍(도박장)이 즐비했다. 카터는 스톡포트·매클스필드·콩글턴 등 북서부 지역을 지날 때 “어디서든 ‘탈퇴’ 포스터를 볼 수 있었지만, ‘잔류’ 포스터는 하나도 못 봤다”고 회고했다. 또 캐넉 체이스·울버햄프턴 등 쇠락한 여러 도시에서 같은 메시지를 확인했다고 전했다. “괜찮은 일자리가 없다.” “정치인들은 우리를 신경쓰지 않는다.” “우리는 잊혀졌다.” “배신당했다.” “이민자가 너무 많고, 우리는 그들과 임금 경쟁이 되지 않는다.” 카터는 “누구도 ‘모욕’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바로 그것이었다”고 적었다.
사실 영국은 유럽연합으로부터 받는 수혜가 골고루 배분되지 않았을 뿐, 대표적인 수혜국으로 분류된다. 크레이그 캘훈 런던정경대 학장은 ‘브렉시트는 코스모폴리탄 엘리트에 대한 반란’이라는 글에서 브렉시트 지지자들 가운데 ‘브리그렛’(영국의 후회) 분위기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한 바 있다. 캘훈은 “브렉시트는 (유럽연합) 비용 대비 혜택으로 촉발된 논쟁이 아니라 (비주류의) 억울함·좌절·분노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디스팩트 시즌3#9_남들은 알려주지 않는 브렉시트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