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통한 미국의 유럽 개입력 약화
미국에겐 영국 대신에 독일의 중요성 커져
대서양 양안동맹의 핵심인 미영동맹 약화
미·중·러·독·영 주요국 관계 격변
미국의 안보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미국 패권을 지키려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패권국가의 출현을 저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대서양 양안동맹을 굳건히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대서양 양안동맹은 미국과 유럽의 동맹이며, 여기에서 핵심은 미-영 동맹이다. 1차대전 이후 유럽에 개입하는 미국의 지렛대는 영국이었다.
미국에게는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미-영 동맹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영국 대신에 유럽연합의 주축인 독일과의 관계가 중요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질서의 중심축인 앵글로아메리카 체제의 약화를 초래할 것이란 분석이다.
현재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의 외교자문역인 니컬러스 번스 전 국무부 차관은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에 전화를 건다면 누구에게 할 것인가?’라는 헨리 키신저의 유명한 질문은 이제 풀렸다”며 “그 대답은 독일 총리 사무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은 우리를 유럽에 소개하고 유럽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실용적 역할을 했으나, 그 역할의 대부분은 끝날 것이다”고 예측했다.
미 상원 외교위의 벤 카딘 민주당 의원은 “독일은 유럽연합에서 더 압도적으로 될 것이다”며 “우리는 독일과 훌륭한 관계이지만, 교섭 담당자로서의 영국을 상실해서 유럽연합에 대처하는데 도전이 닥칠 것이다”고 전망했다.
유럽연합에서 영국의 탈퇴와 독일의 중요성 부각은 미국에게 유럽연합에 대한 개입력과 영향력이 과거와 같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이는 미·영을 중심으로 한 ‘앵글로색슨’식 국제질서의 붕괴라는 전조로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분석했다.
세계 패권국가 지위를 차례로 이은 영국과 미국은 주류 민족이 앵글로색슨계인데다 영어라는 공통점에다 그동안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경제모델을 통해 세계 질서를 주도해왔다. 1차대전 이후 서방 동맹의 중심인 두 나라는 냉전 이후에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 때에 적극 참여해왔고, 현재 이슬람국가(IS)를 상대로 한 폭격에도 철저히 보조를 맞추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대륙의 주요 국가들은 미국이 주도한 세계 질서에 일정 정도 거리를 둬서, 미국은 그동안 영국을 창구로 삼아 유럽 국가의 이견을 잠재워왔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내전은 미국과 영국, 독일 등 다른 유럽국가들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강경한 제재를 주장했으나, 독일은 소극적이었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독일 등을 설득해 가며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이끌어 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브렉시트가 확정된 직후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영국은 앞으로도 안전보장, 외교, 경제 등의 면에서 미국에게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라며 양국 동맹은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양국 관계의 변화와 그 파장에 대한 우려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이크 터너 미국 하원의원은 “독일은 안보 문제에서 앞장서기를 주저했고, 영국과 프랑스를 먼저 쳐다봤다”며 “독일은 앞으로 바꿔야만 할 것이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유럽대륙에 대한 미국의 개입력과 영향력이 약화되면, 독일은 중국과 러시아 등 미국과의 경쟁국과의 관계에서 더욱 재량권을 가지려 할 것으로 예측된다. 독일에게 중국은 이미 최대 무역상대국이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브렉시트로 분열된 유럽을 상대로 외교 공간을 넓힐 것으로 보인다. 특히 러시아는 그동안 최대의 안보 현안이던 유럽연합의 동방 확장의 동력이 줄어드는 호재를 만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했으나, 알렉세이 푸시코프 러시아 하원 외교위원장이 24일 “오바마 정권에겐 큰 타격이다”는 견해를 내놨다.
중국 역시 최근까지 미국의 불만을 살 정도로 독일과 영국을 상대로 경제관계를 확대하면 관계를 증진해왔다.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영국, 유럽연합을 지키려는 독일 모두는 중국을 상대로 경쟁적으로 관계증진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서방 동맹의 약화는 중국과 러시아의 연대 강화를 더욱 재촉할 것으로 전망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23일 상하이협력기구 회의가 열린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났지만 브렉시트가 현실화된 뒤인 25일 베이징에서 다시 만나는 모습을 보였다.
피터 웨스트매컷 전 미국주재 영국 대사는 <파이낸셜 타임스>에 “현재로선 국방, 안보, 정보 및 대테러 문제는 이번 브렉시트 투표의 결과와는 별개이다”면서도 “장기적으로는 세계에서 영국의 역할을 묻는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고 말했다. 앤서니 코데스먼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구원은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있기 때문에 유럽연합은 안전보장 문제에선 중요한 역할은 하지 않는다”면서도 “그러나 군사력이 큰 영국이 탈퇴하는 바람에 유럽의 결속력이 약화돼 러시아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디스팩트 시즌3#9_남들은 알려주지 않는 브렉시트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