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최악의 홍수 피해를 겪은 파키스탄 서부 지역에서 물소들이 침수된 도로를 지나고 있다. 선진국들이 개도국들의 기후 대응 지원 사업에 엉뚱한 지원 실적까지 끼워넣은 것으로 드러났다. 세완/로이터 연합뉴스
초콜릿 판매점 개장, 해안가 호텔 건설, 영화 제작, 석탄발전소 건설, 공항 확장. 이탈리아·미국·벨기에·일본이 개도국의 기후 변화 대응 지원 사업이라고 유엔에 통보한 내역 중 일부다.
<로이터> 통신은 1일(현지시각) 지난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회의에서 개도국 기후 대응 지원을 약속한 선진국들이 지원 사업에 기후 변화와 무관한 것까지 마구잡이로 포함시킨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기후 재정’에 대한 국제 공통의 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각국이 임의로 기후 재정 사업을 규정하면서 엉뚱한 사업까지 기후 지원 실적으로 끼워넣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석탄발전소와 공항 확장처럼 기후 변화 유발 요인으로 꼽히는 분야 지원까지 기후 지원 사업으로 분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정부는 10년 전 방글라데시의 마타르바리 화력발전소 건설 사업에 24억달러(약 3조1500억원)를 지원하면서 이 지원금을 기후 대응 지원으로 분류했다. 지원금을 집행한 일본 국제협력기구(JICA)는 이 발전소가 가동되면 매년 680만t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될 것으로 추산했으나, 탄소 배출을 줄이는 기술도 함께 제공했기 때문에 기후 대응 지원으로 분류했다고 밝혔다.
일본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석탄·가스 발전소 사업 지원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보르그엘아랍 공항의 새 터미널 건설 사업 지원금도 기후 대응 지원금으로 분류했다. 이 덕분에 일본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개도국에 590억달러를 지원한 최대 기후 대응 지원국으로 기록됐다고 통신은 전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자국 기업의 외국 진출을 지원하는 기관인 ‘시메스트’가 초콜릿·아이스크림 업체 벤키의 일본·중국 등 아시아 진출을 지원한 자금 470만달러(약 61억6천만원)를 기후 대응 지원금으로 분류했다. 이탈리아 환경·에너지안보부는 이 사업이 기후 관련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자세한 설명은 거부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미국은 지난 2019년 아이티 해변에 건설되는 호텔 사업에 빌려준 자금 1950억달러를 기후 대응 지원으로 분류했다. 폭우와 허리케인 대응 장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벨기에 정부는 아르헨티나에서 제지용 벌목 일을 하는 전직 럭비 선수가 환경 운동가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영화 제작 지원금 8226달러를 기후 재정에 포함시켰다. 이 나라 해외무역개발부 대변인은 기후 변화 유발 요인 중 하나인 산림 파괴를 다룬 영화이기 때문에 이렇게 분류했다고 말했다. 마크 조벤 필리핀 재무부 차관은 “그들이 기후 재정이라고 부르면 기후 재정이 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로이터>는 6년 동안 35개국이 지원했다고 공개한 4만건의 기후 대응 사업 중 상당수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에 지원됐는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통신이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언론인 프로그램과 함께 이 가운데 10% 가량을 검토한 결과, 적어도 30억달러는 기후 대응과 거의 무관한 사업에 지원된 것들로 확인됐다. 또, 650억달러 규모의 지원 사업은 어떤 분야에 지원됐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고 통신은 전했다.
기후 변화와 별 상관이 없는 사업까지 지원 실적에 포함시켰지만, 선진국들이 실제로 지원한 자금은 애초 목표에 미달했다. 선진국들은 2020년까지 연 지원금을 1000억달러(약 131조원)까지 늘리겠다고 약속했으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그해 실제 지원금은 833억달러에 그쳤다. 이 기구는 2021년과 지난해의 지원금도 목표에 미달했을 것으로 예상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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