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현지시각) 아침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 때문으로 추정되는 폭발로 시민 한 사람이 숨져 쓰러져 있고 주변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다. 키이우/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 당국이 8일(현지시각) 새벽 발생한 본토와 크림반도를 잇는 ‘크림 대교’(케르치 다리) 위에서 발생한 폭파 사건을 우크라이나 특수기관이 벌인 ‘테러 공격’이라는 잠정 결론을 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이 결론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견해를 밝히며 대대적인 보복을 예고했다. 러시아는 10일 오전(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겨냥해 미사일 공격을 퍼부었다. 크림 다리 폭파 사건이 러시아의 처절한 보복을 예고하는 불길한 신호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
알렉산드르 바스트리킨 러시아 조사위원회 위원장은 9일(현지시각) 푸틴 대통령을 만나 이번 사건의 초기 조사 결과를 공개하며 이 폭파가 “우크라이나 특수기관에 의해 준비된 테러 행위”라는 잠정 결론을 제시했다.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이 누리집을 통해 공개한 발언록을 보면, 바스트리킨 위원장은 러시아 조사팀이 현장에 도착해 “폭발물 전문가, 범죄 전문가들과 현장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수행한 뒤 ‘근거가 잘 갖춰진’ 잠정 결론에 이르렀다”면서 “이는 분명히 테러 행위이다. 모든 초기 조사는 데이터는 우리를 명백한 결론에 이르게 한다. 러시아 연방에게 매우 중요한 대형 민간 사회간접자본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가진 우크라이나 특수기관에 의해 준비된 테러 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이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해선 “수많은 목격자를 조사했고, 폭발물 전문가 등 특수 전문가들의 연구가 시작돼 대부분 완료됐으며. 디엔에이(NDA) 검사와 포렌식 분석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또 다리 위에서 폭파한 트럭의 경로를 파악하고 트럭을 이동시킨 운전자들의 신원을 확인했다면서, 이 차량이 “불가리아, 조지아, 아르메니나, 북 오세티아, 크라스노다르주(크림반도와 마주한 러시아 영토)를 거쳐 왔다고 말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의 특수기관, 러시아 시민, 외국 나라들이 이 테러 행위를 도왔다”고 덧붙였다.
보고를 받은 푸틴 대통령은 “당신이 지금 보고했듯 여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러시아 연방의 민간 사회간접자본을 파괴하기 위해 계획된 테러 행위”라며 “우크라이나 특수기관은 그 입안자이고, 수행자, 조정자들”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우크라이나 현지 언론인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도 8일 우크라이나 법 집행 기관의 소식통을 인용해 “소식통에 따르면 이 폭발은 우크라이나 보안국에 의해 수행된 특별 작전”이라며 “하지만 보안국은 자신들이 이 사건에 참여했는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은 2월 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구체적인 전황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자제해 왔다. 하지만, 이번엔 본인이 직접 나서 이 사건을 ‘우크라이나의 테러 공격’이라고 직접 규정하며 대대적인 보복을 예고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 결론에 대한 퇴로를 끊고 ‘올인’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10일 안전보장회의를 열어 이번 사태에 대한 후속 조처를 논의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구체적인 보복 조처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우려되는 것은 이 사태는 자칫하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핵 보복’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2008~2012년 대통령)은 지난 7월 우크라이나군이 크림반도를 공격하면 “우크라이나는 ‘종말의 날’을 맞을 것”이라며 핵 사용을 암시한 바 있다. 그는 10일에도 “키예프(키이우) 정권이 저지른 테러 및 사보타주가 틀림 없다”며 “러시아의 대응은 테러리스트 제거밖에 없다”고 말했다.
눈길을 끄는 8일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 작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세르게이 수로비킨 항공우주군 총사령관(대장)의 존재다. 그는 시리아 원정군 사령관 시절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별하지 않은 무차별 폭격을 지시했던 잔인한 인물이라고 영국 <가디언>이 지적했다. 러시아는 2015년 9월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2016년 반정부군이 끈질긴 저항을 벌이던 북부의 제2의 도시 알레포를 포위한 뒤 무차별 공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민간인들이 희생된 바 있다.
‘푸틴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크림 대교 폭발 이후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한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이 거듭되는 중이다. 10일 오전 수도 키이우 중심부에선 수차례 큰 폭발이 발생했다.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은 텔레그램을 통해 “도시의 중심부 셰브첸코 지역에서 여러 차례 폭발이 있었다”고 밝혔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현지 기자들이 세 차례 큰 폭발음을 들었다”며 “폭발이 있기 1시간 전 키이우에서 공습 사이렌이 울렸다”고 전했다. 외신들은 이번 공격이 미사일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로이터> 통신은 목격자를 인용해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고 전했다.
전날인 9일엔 러시아군이 미사일과 대포로 우크라이나가 점령하고 있는 자포리자시 민간인 거주 지역을 타격했다. 그로 인해 20명이 숨지고, 20채의 주거 빌딩과 50채의 고층 빌딩이 손상됐다.
러시아는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한 뒤 4년 만인 2018년 5월 크림 다리를 개통했다. 푸틴 대통령이 당시 개통식에 참석해 직접 트럭을 몰고 다리를 건넌 뒤, 이 구조물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기념하는 상징물이 됐다. 이 폭파가 우크라이나 특수기관의 테러가 맞다면,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인들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다.
정의길 기자
Egil@hani.co.kr 조해영 기자
hy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