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10월 31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참석한 미하일 고르바쵸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연합뉴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해체로 이어진 개혁을 추진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30일 숨졌다. 향년 91.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 등은 고르바초프 전 서기장이 오랫동안 노환을 앓다가 이날 저녁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에서 숨졌다고 전했다. 러시아 언론들은 그가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한 2020년 입원해 요양해 왔다고 전했다. 장례식을 치른 뒤 러시아의 중요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모스크바 노보드비치 공동묘지에 있는 아내 라이사의 옆에 묻히게 된다.
고르바초프가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중심 무대에 올라선 것은 ‘제국 소련’이 내리막으로 치닫던 1985년이었다. 소련 제국의 최고 자리인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라섰을 때 그는 정치국 내 최연소 국원이었다. 54살의 젊은 서기장은 소련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 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통해 정치적 민주화를 허용하고, 경제 효율성을 높이려 했다. 앞선 서기장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사망 3년 전부터 사실상 집무를 보지 못했고, 뒤를 이은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네코도 고령과 병환으로 서기장에 오른 지 1~2년만에 숨졌다. 늙고 병든 최고 지도자들의 모습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 당시 소련 체제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젊은 서기장은 소련의 개혁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소련의 침체된 경제를 회복하고, 정치 과정을 효율화하기 원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사회주의권과 소련의 해체로까지 내달았다. 1989년 동독 붕괴를 시작으로 동구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1991년 12월 소련마저 해체됐다.
고르바초프는 이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과 소련 내 공화국들을 억압하지 않고, 냉전을 평화적으로 끝냈다. 동서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제국 소련이 붕괴하며, 국내에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소련이 해체된 뒤인 1996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0.5%를 얻는데 그쳤다. 현재 러시아에선 그를 ‘소련을 해체시킨 반역자’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2000년 5월 권좌에 오른 블리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2005년엔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회고하며,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손대고 싶은 사건으로 이를 꼽았다.
고르바초프는 1931년 3월2일 남부 러시아의 스타브로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는 집단농장에서 일했다. 그 역시10대 때 콤바인을 운전했다. 이후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 1955년 모스크바국립대학을 졸업한 뒤 공산당의 열성 당원이 됐다.
합리적이고 민주적 태도를 지닌 신세대 공산당원이었던 고르바초프는 당의 딱딱한 위계질서와 고령화된 지도부에 점점 염증을 느꼈다. 1961년 청년공산주의자연맹의 지역 서기장이 된 뒤, 공산당 전당대회에 대의원으로 파견돼 중앙 무대로 진출했다. 농업 행정을 맡아 혁신을 도입했다. 이런 업적으로 당내 지위가 급속히 올라갔다. 1978년엔 모스크바에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농업서기로 승진했고, 2년 뒤엔 정치국원으로 지명됐다. 브레즈네프가 1982년에 사망한 뒤엔 안드로포프 서기장 밑에서 해외를 방문했다. 1984년 런던에서 그를 마주한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는 “나는 고르바쵸프를 좋아한다”며 “우리는 함께 일을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전 지도자들과 다른 고르바초프의 세련된 의상과 어투, 개방적인 자세는 서구의 이목을 끌었고, 부인 라이사 역시 소련 지도자의 부인 중엔 처음으로 대외활동에 나섰다.
최고 권력을 쥔 고르바초프의 첫 임무는 경제의 활력 회복이었다. 이를 위해선 통제경제의 사령탑인 공산당을 개혁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인민위원 직선제 도입 등 당의 민주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억압적인 정치체제를 완화하자, 소련 내 각 민족들의 민족주의가 분출했다. 1986년 12월엔 카자흐스탄에서 첫 반소 시위가 벌어졌다.
다른 한편으론 소련 경제를 옥죄는 군비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군축협상에 나섰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 등 일련의 군축협상을 진행했다. 또 재래식 무기 감축도 선언했다. 아프간에서 전쟁을 종식시키려 1989년 철군을 단행했다.
1991년 조시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총서기는 마침내 전략무기감축협정에 서명했다. 조지 부시와 고르바초프 전 총서기가 199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 붕괴 10주년 행사에 참여해 포옹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하지만, 그의 개혁개방 정책은 소련 경제의 회생이 아닌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로 동독이 무너지며, 동구 사회주의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1989년 12월엔 지중해의 섬 말타에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1990년엔 1당 독재를 폐기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해 당선됐다.
이런 흐름에 반발한 소련 군부의 보수 강경파들은 1991년 8월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흑해 크림반도 별장에 연금했다. 보리스 옐친 당시 모스크바 당서기가 쿠데타 반대의 선봉에 서서 이를 저지하고 권력을 쟁취했다. 옐친은 소련 해체를 주도하며 고르바초프를 무력화했다. 결국 1991년 12월26일 소련이 해체되며,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연방이 출범했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국제적인 명사로 활약했으나, 러시아 내에선 영향력을 잃었다. 1999년엔 평생의 반려자였던 아내 라이사가 백혈병으로 숨졌다.
고르바초프는 푸틴 대통령 체제엔 비판적이었지만 2014년 3월 크림반도 합병에는 찬성했다. 그는 당시 “크림이 당시 소련법, 공산당 규정에 따라서 우크라이나로 할양됐지만, 주민들에게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며 “이제 주민들 자신이 그런 실수를 교정하도록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생전 자신이 추진한 개혁·개방, 냉전 종식, 핵무기 감축 등이 옳은 정책이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결과를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겐 통제 경제를 시장 경제로 바꾸려는 의도도 없었다. 1985년 당 대의원 연설에서 “여러분 중 일부는 시장을 경제의 구원자로 보는데, 하지만 동지들은 구원자가 아니라 배를 봐야한다. 그 배는 사회주의이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 경제를 회복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해체와 냉전 종식으로 향하는 첫 걸음을 내디뎠다. 역사는 이 질풍노도의 과정을 촉발시켰던 인물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