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 모스크바 근교 노보오가료보 관저에서 화상회의를 앞두고 생각에 잠겨 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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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보기보다 강하지 않지만, 보기보다 약하지도 않다.”
근대 이후 국제 외교가에서 전해지는 격언이다. 이 격언은 러시아가 국제질서나 국제분쟁에서 한 역할에서 나왔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광대한 영토와 인구, 병력을 가져서 주변 국가들로부터 공포감을 자아냈다. 반면, 러시아는 봉건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정치 체제, 낮은 생활 수준으로 혐오와 경멸을 자아냈다. 이는 러시아에 대한 과대평가나 과소평가를 낳았다. 국제질서와 분쟁에서 러시아는 예상과 기대와는 달리 극적으로 반전된 역할을 했다. 유럽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압도적인 패권국가의 부상을 막거나, 기존의 국제질서가 붕괴되는 데 그 원인을 제공했다.
러시아가 국제관계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 패권을 놓고 북미와 유럽 등지에서 격돌한 7년전쟁(1756~63년) 때이다. 당시, 유럽의 근대화를 추종하며 동방의 후진국 취급을 받던 러시아는 프랑스 쪽에 섰다. 러시아는 영국 편에 선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는 파죽지세로 베를린 문턱까지 진군했다. 러시아가 유럽의 지도를 바꿔놓으려는 직전에 전쟁의 주역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사망해, 조카인 표트르 3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평소 서유럽, 특히 독일을 흠모하던 표트르 3세는 병력 철수를 명령하고는 적극적인 친프로이센 정책을 펼치며 모든 정복 영토를 프로이센에 반환했다.
이때부터 국제관계의 세력균형에서는 ‘러시아 수수께끼’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에서 기존의 세력균형이 무너질 위기를 타개하거나, 혹은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는 데 희생양이 됐기 때문이다.
유럽과 전세계를 프랑스의 패권으로 몰고 가던 나폴레옹을 극적으로 패퇴시킨 것은 러시아였다.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놓고 발칸반도부터 한반도까지 영국과 대치하며 그레이트게임을 벌인 것도 러시아였다. 그런 러시아가 아시아의 신흥국 일본과의 러일전쟁에서 패배했다. 러일전쟁은 그레이트게임을 종료하고, 러시아의 몰락을 예고했다. 1차대전에서 독일에 밀리면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소련이 수립된 곳도 러시아이다. 반면, 2차대전 때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에 일격을 가하며 나치 독일을 패망시켜, 2차대전에서 연합국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소련이 했다. 전후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으로서 양극 체제를 형성했던 소련이었으나,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작은 나라를 침공했다가 몰락의 길을 갔다. 냉전과 양극 체제를 만들고 스스로 허문 것도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약해 보일 때 강했고, 강해 보일 때 약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러시아의 행보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 병력을 구축하고 침공 위기를 1년 동안 지속시키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위기를 격화시키면서 믿는 구석은 그 지역 군사분쟁에서 서방이 무력하다는 점이다.
러시아가 병력을 구축하는 우크라이나 동부는 2차대전 때 나치 독일이 패망한 계기인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진 인근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 지역인 이곳은 전통적으로 대륙세력의 마당이다.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 전쟁이나 2014년 크림반도 합병에서 보듯이, 서방은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군사행동에 무력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 파병은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이번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다 해도, 미국 등 서방이 직접적인 군사대응은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가 마음껏 위기와 위협을 고조할 수는 있지만, 침공은 별개의 문제이다. 넓은 국토의 우크라이나를 다시 러시아의 일부로 되돌리는 전쟁은 과거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만큼이나 무모하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이후 러시아의 군사개입도 ‘저비용 고효율’로 수행되어왔다. 러시아 연구가인 하룬 이을마즈는 <알자지라>에 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는다’라는 기고에서 러시아가 조지아, 시리아, 리비아, 크림반도 합병에서 치밀한 지정학적 계산을 통해 비용 대비 효과가 뛰어난 군사개입을 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2008년 조지아로부터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분리독립을 후원하려고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러시아군은 남오세티야 등에서 조지아군을 축출했다. 러시아는 더 나아가 조지아를 완전히 양분해서, 터키로 가는 석유·가스관 통제권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군사행동을 삼가고 유럽의 중재에 응했다.
2015년 시리아 내전에서 바샤르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려고 개입했을 때도, 대규모 지상전 정규병력 파견을 하지 않았다. 전투기·특수전병력·용병·군사고문·함정 등만을 파견해서도, 아사드 정부군의 내전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러시아는 미국, 이스라엘, 터키 등과 협상하면서, 반군들이 대공무기를 제공받지 않도록 하고는, 정부군에게는 반군 지역을 폭격할 수 있는 공군력을 지원했다. 리비아 내전에서 러시아는 동부의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 세력에게 용병과 무기만을 지원하고서는, 리비아에서 서방과 동등한 몫을 확보했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지난해 4월부터 시작됐다. 러시아가 실제로 침공이나 전쟁을 할 계산이라면, 1년 가까이 위기를 끌면서 전세계의 경고와 반발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등 서방이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연일 경고하는 것은 ‘사소한 침입’(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전망) 등 러시아의 어떠한 군사행동도 금지선 안에 묶어두려는 못박기이다.
러시아는 이번 우크라이나 위기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동유럽 지역에서 군사훈련, 미사일 및 핵무기 배치 문제 등에 관한 협상을 제의받았다. 이는 러시아가 그동안 내세워온 동유럽 및 옛 소련 지역은 러시아의 ‘세력권’이니 자신들과 협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어느 정도 수용된 것이다. 러시아는 이 위기를 쉽게 종식시키지 않을 것이다. 위기를 지속시키면서, 옛 소련 지역, 더 나아가 동유럽 지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기정사실화하는 ‘세력권’을 구축하려고 할 것이다.
러시아를 얕봤을 때 러시아는 강력했고, 러시아가 오만했을 때 러시아는 허약했다. 이번 위기가 파국이 되지 않으려면,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멸, 러시아 자신의 오만이 먼저 배제돼야 할 것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에서 국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 신문에 글을 쓰는 도중에 <이슬람 전사의 탄생> <지정학의 포로들> 등의 책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