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대원이 8일(현지시각) 수도 카불에 있는 주아프가니스탄 미국대사관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지난달 말 미군과 대사관 직원들이 모두 철수했고, 텅 빈 대사관의 콘크리트 담에는 탈레반을 상징하는 깃발 문양이 그려져 있다. 카불/AFP 연합뉴스
이슬람주의 국제무장단체 알카에다가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 세계무역센터(WTC)에 탈취한 비행기로 ‘몸체 공격’을 감행한 2001년 9월11일. 눈앞에서 벌어지는 ‘초현실적 광경’ 앞에서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 대행에게 즉각 대응을 지시하면서, 자신은 아프가니스탄의 텅 빈 훈련장만을 공습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9·11 테러에 대한 미 정부의 조사 기록인 ‘9·11 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럼스펠드 장관은 테러의 주범인 알카에다의 수장 빈라덴뿐 아니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동시에 쳐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유럽 출장에서 돌아오던 더글러스 페이스 국방차관의 생각도 같았다. 그 역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후세인을 타도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튿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리처드 클라크 백악관 안보조정관에게 ‘후세인이 이번 테러에 관여한 증거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클라크가 “알카에다가 했다”고 말하자, 부시 대통령은 “알아. 하지만 사담이 이 일을 했는지 알아보라”고 재차 명령했다. 9·11 테러 직후의 극한 혼란 속에서 미 지도부가 관심을 보인 것은 테러조직 알카에다를 나름 단속해왔던 후세인 정권을 쓰러뜨리는 일이었다. 미 지도부의 이런 ‘뒤틀린 인식’은 왜 미국이 이후 20년에 이르는 ‘긴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됐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테러가 발생한 지 한달 뒤인 2001년 10월 미국은 예상대로 알카에다 기지가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어,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 정권을 타도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중동의 안정과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2011년 아랍의 봄의 여파로 발생한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의 혼란’ 속에서 2014년 이슬람국가(IS)가 부상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미국은 2014년 본격화된 예멘 내전에 사우디아라비아를 지원하며 간접 개입했고, 이란과는 2020년 1월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 부대 사령관을 드론으로 폭격해 살해하는 등 저강도 전쟁을 벌이고 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보다 더 큰 충격을 안긴 9·11 테러를 계기로 미국은 세계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질서를 만들려는 일방주의로 치달은 것이다. ‘엉뚱한 적’으로 ‘오인한 나라’에서 ‘틀린 방식’으로 수행된 ‘잘못된 임무’는 ‘이길 수 없는 전쟁’으로 변했고, 미국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20년 중동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던 시점은 소련의 붕괴로 인한 냉전의 승리로 자본주의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인류 역사의 최종 단계라는 역사관이 드넓게 퍼지던 무렵이었다. ‘역사의 종언’ 담론은 네오콘 등 극단적 우파 이상주의 세력을 득세시켰고, 2001년 1월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며 미국식 일방주의라는 외교정책으로 구체화됐다. 당시 미국 외교안보 분야를 장악한 네오콘들은 중동에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해 중동의 질서를 영구히 재편하는 ‘중동 개조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중동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눈엣가시인 후세인 정권을 교체해 중동 개조론 전파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다.
미국이 9·11 테러 뒤 미국이 후세인 정권의 핵개발 혐의까지 조작하며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 것에 대해 미국 외교안보 전략가 가운데 대표적 현실주의자로 꼽히는 헨리 키신저조차 2005년 <워싱턴포스트>와 회견에서 “아프간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두둔했다. 9·11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비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 돼야 한다고 설명한 것이다. 세계에 더 큰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이라크 전쟁이 필수적이었다는 견해다. 언론인 론 서스킨드는 2004년 10월 <뉴욕 타임스> 기고에서 “우리는 이제 제국이고, 우리가 행동하면 우리 자신의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부시 대통령의 측근의 말을 소개했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집착은 알카에다와 그 수장 오사마 빈라덴의 제거라는 ‘테러와의 전쟁’의 핵심 목표조차 허무하게 증발시켰다. 미국은 아프간 침공 뒤 파키스탄 접경 토라보라 전투에서 빈라덴을 코앞까지 추적했으나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 이 전투를 지휘한 마이크 드롱 해병 중장은 국방부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토라보라 전투 때 미군 지도부는 이미 이라크 전쟁 준비에 정신이 팔려있었고, 미군 전력이 아프간에서 발목이 잡히기를 원하지 않았다.
미국은 중동 개조론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추구하면서 ‘정권 교체’(레짐 체인지)에만 초점을 뒀지 그 이후 ‘국가 건설’(네이션 빌딩)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모순을 노출했다. 부시는 “우리 군대가 국가 건설이라 불리는 것에 사용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투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은 첨단장비를 통해 중무장 병력의 경량화를 추구한 럼스펠드 주도의 군 개조론에 입각해 ‘더 적은 병력으로 더 빠르게 배치해서 결정적으로 승리한다’는 전쟁 계획에만 집착했다. 그 결과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침공 한달 반 만인 2003년 5월1일 항모 에이브러햄 링컨에서 ‘임무 완수’라는 펼침막을 내걸고 “이라크에서 주요 작전은 모두 끝났다”고 승전을 선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전쟁은 그 이후 시작됐다.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이미 정권이 쓰러졌기에 이 전쟁은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진행됐다. 아프간 침공이 시작된 지 7개월만에 전쟁 주역인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전쟁이 수렁에 빠졌음을 인지했다. ‘눈송이’이라고 불린 럼스펠드의 기밀 해제된 메모를 보면, 2002년 4월17일 장군들에게 “내가 참을성이 없는 것 같다”며 “우리가 아프간에서 떠나는데 필요한 안정을 제공할 것들이 진행되는데 신경 쓰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아프간에서 미군을 빼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바로 그날 버지니아 군사학교에서 미국의 아프간 전쟁이 “아프간의 전쟁사에서 헛발질과 실패의 오랜 시간 끝에 나온 성공이었다”며 “우리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고 단언했다. 나중엔 럼스펠드 장관마저 2003년 9월8일 메모에서 “누가 나쁜 놈들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8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시민들이 9·11 메모리얼 파크 앞에 서 있다. 9·11 메모리얼 파크는 2001년 9월11일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지은 기념관이다. 뉴욕/AFP 연합뉴스
결국, 미국의 전쟁 전략은 ‘대테러 전략’에서 ‘반내란 전략’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게릴라전에 대응하는 반내란 전략은 주민들을 위무해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려면 미국식 민주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반군들이 활동하는 비도시 지역에선 미국이 지원하는 국가 건설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없었다. 천문학적 돈을 쏟아부어도 국가 건설은 미군의 영향력이 미치는 도시 지역에 한정됐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제공한 막대한 예산은 부패한 현지 엘리트들의 먹잇감이 됐다.
전문가들은 미국 텍사스주 크기인 아프간에서 국가 건설 작업에 성공하려면 10년 동안 연 40억~50억달러가 필요하다는 전망을 내놨다. 미국은 2002년부터 2009년까지 아프간에 연평균 17억5천만달러를 지원했지만, 반내란 전략을 선택한 2009년 이후엔 지원 폭을 넓혀 총 133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물가 변수를 고려하면, 2차 세계대전 뒤 미국의 유럽 부흥책인 마셜플랜보다 큰 액수다. 이런 노력에도 아프간과 이라크의 비도시 지역엔 학교가 없고, 학교가 있다 해도 교사가 없다. 아프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00달러에 불과하다.
중동에서 다시 한번 예상치 못한 정세 변화를 불러온 것은 2011년 초 시작된 ‘아랍의 봄’이었다. 중동 전역으로 번진 혁명의 불길은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기는 했으나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들을 제어하던 시리아·리비아 등을 직격했다. 그로 인해 심각한 세력 공백이 발생했다. 부시 대통령은 2007년 1월10일 이라크 전쟁의 실패를 자인하면서 증강 전략을 발표했다. 이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우리는 알카에다를 아프간의 안식처에서 몰아내지 못하고, 자유 이라크에서 새로운 안식처를 만들게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 이라크와 시리아 영토 내에서 전무후무할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준국가 단체인 ‘이슬람국가’라는 괴물이 등장했다. 또 미국이 중동에서 주적으로 설정하는 이란의 영향력이 커졌다.
미국의 20년 중동전쟁은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을 크게 바꾸었다. 아프간에는 다시 탈레반이 돌아왔고, 리비아·이라크·시리아·예멘 등 중동의 여러 나라에서는 무정부 상태와 내란·내전이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미국은 아프간 철군을 시작으로 중동에서 발을 빼려고 하고 있다. 올해 1월 집권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7월 백악관을 방문한 무스타파 카디미 이라크 총리에게 이라크에서도 연말까지 전투 임무를 종결하고, 현재 남은 2500명의 주둔 병력은 이라크군 지원과 훈련 임무만을 맡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8월31일 아프간 철군을 선언하는 대국민 연설에서 “우리는 중국과 심각한 경쟁을 하고 있고, 여러 전선에서 러시아의 도전을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아프간 철군으로 20년 중동전쟁은 저물고 있으나, 그 전쟁이 남긴 재앙과 흔적은 여전히 미국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리고 미-중 전략경쟁이라 이름 붙은 새 갈등의 씨앗이 한반도를 포함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싹트려 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