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통합의 길
브뤼셀에 신청사 지었으나 프랑스 반대로 완전이사 못해
사무국은 룩셈부르크에…이동비용 연 3천억 ‘비효율 상징’
브뤼셀에 신청사 지었으나 프랑스 반대로 완전이사 못해
사무국은 룩셈부르크에…이동비용 연 3천억 ‘비효율 상징’
유럽의회 의원들은 한달에 한번 ‘서커스 여행’을 떠난다. 출발지는 대부분의 의정활동이 이뤄지는 벨기에 브뤼셀, 목적지는 동남쪽으로 450여㎞ 떨어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다. 의원 736명뿐 아니라 보좌진까지 수천명이 비행기나 기차로 또다른 의사당이 있는 스트라스부르로 향한다. 트럭 수십대가 서류 등 의회 업무에 필요한 물품들을 실어나른다. 이 풍경이 마치 유랑 서커스단과 비슷하다고 해서 ‘서커스 여행’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한 달에 단 나흘간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리는 본회의를 위해 먼 길을 오가는 의원들과 직원들의 고달픔은 1992년 합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스트라스부르에 있던 유럽의회는 1985년 브뤼셀에 건립된 신청사로 이사를 갔으나 프랑스가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적 분쟁지대였던 스트라스부르의 상징성’을 이유로 완전한 이전에 반대하면서 문제가 꼬였다.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고집을 꺾지 않으면서 스트라스부르는 1992년에 유럽의회의 공식 소재지로 인정받았다. 이런 이유로 1년에 48일만 문을 여는 의사당이 생겨났다. 사람과 물자가 두 의사당을 오가는 데 연간 2억유로(약 3034억원)가 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더 복잡하다. 유럽의회 사무국은 유럽 통합 초기인 1958년에 유럽의회가 처음으로 열린 룩셈부르크에 남아있다. 유럽의회는 브뤼셀, 스트라스부르, 룩셈부르크에 모두 근거를 둔 ‘한 지붕 세 가족’인 셈이다.
2006년에는 유럽인 100만명이 유럽의회를 브뤼셀로 완전히 옮기자는 청원에 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유럽의회의 ‘서커스’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직원은 “유럽의회 소재지를 둘러싼 혼란이야말로 유럽연합이 안고있는 비효율성과 자국 중심주의의 결정판”이라고 말했다.
유럽연합의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에서는 나눠먹기식 자리 배분이 이뤄지고 있다. 장관 역할을 하는 27명의 집행위원 자리는 각 회원국이 한 자리씩 차지한다. 인구가 80여만명인 키프로스나 그 100배 규모인 독일이나 집행위원을 한명씩 배출한다. 능력을 근거로 사람을 고르기 어려운 구조다.
정해진 임기가 2013년 5월까지이던 로렌조 비니 스마기 유럽중앙은행 이사가 지난달 물러난 과정도 유럽 통합이라는 이상의 뒤편에서 개별국의 이해가 얼마나 첨예하게 맞서는지 보여준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이탈리아 출신인 마리오 드라기가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되자, 이탈리아인 2명이 이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에게 스마기를 ‘정리’해달라고 요구했다. 유럽중앙은행 이사회 구성원의 국적에 대해서는 따로 규정이 없다. 하지만 밀실에서는 다른 나라를 견제하고 자국인을 밀어넣기 위해 협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공식적 기구는 기구대로 움직이고 다른 쪽에서는 강국들이 보이지 않는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은 혼란을 가중시킨다. 한 유럽의회 의원은 최근 유로존 위기 관련 청문회에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유럽과 얘기하려면 누구한테 전화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며, 유럽연합 체제의 혼란스러움을 지적했다.
브뤼셀/이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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