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영국 대법원이 브렉시트 협상 개시를 위해선 정부가 의회 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판결한 직후, 제러미 라이트 법무담당 수석 비서관이 대법원 청사 앞에서 “판결에 실망했지만 존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런던/ EPA 연합뉴스
영국이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협상 개시를 결정할 권한이 영국 정부가 아닌 의회에 있다는 확정 판결이 나왔다.
영국 대법원은 24일 오전(현지시각) “대법원 판사 11명 중 8 대 3의 의견으로, 정부는 의회의 승인이 없이는 (유럽연합 탈퇴 절차인) 리스본조약 50조를 발동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고 <비비시>(BBC) 등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정부가 (영국을 구성하는 4개 홈네이션 중 잉글랜드를 제외한) 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 등의 의회 승인은 필요 없다고 밝혔다.
앞서 영국 고등법원은 정부가 유럽연합 쪽에 브렉시트 협상 개시 의사를 통보하기에 앞서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영국 정부는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고법의 결정을 유지했다.
테리사 메이 총리는 유럽연합과의 완전한 결별을 뜻하는 ‘하드 브렉시트’를 천명하고, 오는 3월 이전에 리스본조약 50조를 발동하겠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의회 토론과 승인 절차를 거치게 됨에 따라 브렉시트 협상 개시는 더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
판결 직후 제러미 라이트 법무담당 수석 비서관은 성명을 내어 “정부는 판결에 실망했지만 존중할 것이며, 대법원 판결의 이행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이르면 이번주 안에 브렉시트 협상 개시 승인을 요청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이에 대해 제1야당인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의 대변인은 “국민투표 결과를 존중해 50조 발동을 거부하진 않겠지만, 보수당이 브렉시트를 이용해 영국을 유럽의 역외 조세회피처로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 법안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24일 영국 런던의 대법원 청사 앞에서 영국의 유럽연합 잔류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유럽연합 깃발을 흔들며 브렉시트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런던/ EPA 연합뉴스
유럽연합 탈퇴 조건은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다. 리스본조약 50조 ‘회원국의 탈퇴’에 관한 규정을 보면, 탈퇴 희망국은 먼저 유럽연합 정상회의에 탈퇴 의사를 통보해야 한다. 그러면 유럽연합과 탈퇴 희망국 간에 최장 2년의 협상이 시작된다. 양쪽은 무려 8만쪽 분량에 이르는 유럽연합 협약들을 일일이 검토해, 회원국 공동법규들을 포함한 법령들의 폐기·존속 또는 수정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최종 협상안은 유럽의회의 표결을 거친 뒤, 다시 유럽연합이사회의 다수결 승인을 통과해야 ‘이혼’ 절차가 완성된다. 이론적으로는 협상 기간 중에 영국이 탈퇴 의사를 번복할 수도 있다. 최종협상안에 합의하지 못해도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협상시한을 연장하지 않는 한 해당국은 자동으로 유럽연합 회원국 지위를 상실한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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