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8일, 이탈리아의 재정지출 승인안 표결이 이뤄졌던 그날, 정말로 ‘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망언 종결자이자 부정부패의 아이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 얘깁니다. 이 표결에서 과반을 얻지 못한 그는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3개월 만인 12월6일, 그가 다시 정계 복귀를 선언했습니다. 17년으론 모자란 모양이에요. 여론이 호의적이진 않다지만, 이탈리아 민심은 모른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미라의 귀환.”(Le Retour de la momie)
프랑스의 진보적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지난 10일(현지시각) 실비오 베를루스코니(76) 전 이탈리아 총리의 정계 복귀 선언 소식을 커버 기사로 전하며 그의 얼굴 사진 위에 커다랗게 이 제목을 달았다. 지난해 이탈리아 재정위기와 미성년자 성매수, 탈세 등 각종 추문에 떠밀려 사임하며 ‘정치적 생명’이 끝난 듯 보였던 그가 불과 13개월 만에 보란 듯 재기에 나섰다는 걸 상기시키는 제목이다.
방송 완전히 장악하고 네번째 총리직 도전
“지난해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돼 두고 볼 수만은 없게 됐다”는 게 베를루스코니가 지난 6일 밝힌 정계 복귀 선언의 이유다. 1994년부터 17년간 3번이나 총리를 지내면서 이탈리아 경제를 망가뜨린 그가, 위기 진화를 위해 불과 1년 전 ‘소방수’로 투입된 마리오 몬티 총리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모양새다. 그가 소속된 자유국민당(PDL)에선 “베를루스코니가 내년에 치러질 총선에 후보로 출마할 것”이란 얘기는 물론, 몬티 총리 내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발표까지 나왔다. 과반을 넘는 다수당이 없는 이탈리아 의회에서 제1여당인 자유국민당의 지지 철회는 곧 내각 해산 및 조기 총선이 불가피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몬티 총리는 이에 7일 “자유국민당의 지원 없이는 정상적인 임기 수행이 가능하지 않다”며 내년도 예산안만 통과되면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2월17일이냐 24일이냐, 조기 총선은 이제 구체적인 ‘택일’만 남은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경제 위기 상황 속에 정치적 불안거리까지 던져놓고선 정작 베를루스코니는 태연해 보인다. 그는 ‘스캔들 제조기’란 명성에 걸맞게 언론에 가십거리까지 제공해가며 공공연한 선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모양새다. 그는 지난 16일 자신이 소유한 방송 <카날레 5>에 출연해 나이가 49살이나 차이 나는 애인 프란체스카 파스칼레(27)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그는 이 약혼 발표 방송을 현재 재판중인 미성년자 성매수 혐의(이른바 ‘루비 게이트’)를 부인하는 자리로 적극 활용했다. 두번째 부인 베로니카 라리오와 이혼소송중인 그는 잘 알려졌다시피 2010년 당시 17살이었던 소녀 카리마 엘마루그(일명 루비)에게 돈을 주고 ‘붕가붕가 파티’란 이름으로 섹스 파티를 벌였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이 방송에서 “이혼소송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 외로움을 느껴 파티를 열었지만,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우아한 저녁 식사 자리였을 뿐”이라고 ‘해명’을 했다. “정복의 기쁨이 없는 성관계에는 관심이 없다”거나 “(미성년 성매수가) 동성애자인 것보다는 낫다”는 마초적 망언을 일삼던 면모는 여전한 셈. 하지만 베를루스코니의 지인이기도 한 이 방송의 진행자는 세간의 비판에 대한 입장을 묻기는커녕 그의 약혼을 축복하느라 바빴다.
‘도대체 스캔들, 부정부패의 꼬리표를 단 정치인 한 사람이 어떻게 이탈리아 정국을 이렇게 오래도록 진흙탕으로 만들 수 있는 걸까.’ 1994년 베를루스코니의 첫 정계 진출 이후,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서구 언론·학계의 줄기찬 연구 대상이었다. 우선,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차례나 이뤄진 정권 교체에 따른 피로감과 정치 부패에 칼을 댄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 운동이 불러온 정치 혐오감이 그를 불러냈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1978년 케이블 텔레비전 회사에서 시작해, 메디아세트라는 이탈리아 최대의 미디어 그룹을 소유한 그가 2002년부터 국영방송마저 장악에 나선 것이 온갖 스캔들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탈리아 1> <카날레 5> <레테 4> 등 이탈리아 3대 민영방송은 물론, 최대 판매부수를 가진 잡지 <파노라마>, 일간지 <일 조르날레> 등을 소유한 베를루스코니는 2002년 국영방송 <라이>(RAI)의 이사 5명 가운데 3명을 자기의 측근으로 채워 <라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또한 정치 뉴스에서 ‘여당(정부)-야당-다시 여당’의 입장을 전하도록 하는 ‘샌드위치’ 보도 지침을 내려, 정부의 잘못된 점을 꼬집는 야당의 저항을 무력화시켜나가기도 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방송의 90% 이상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언론이 그를 얼마나 자주 비추는지, 남편과 부모 얼굴도 몰라보는 뇌질환 주부가 신문에 난 그의 얼굴만큼은 알아봤다는 사실이 과학저널에 실린 적도 있다. 위에 언급된 약혼 발표 방송에서 보이듯, 지금도 그는 자신이 소유한 방송사는 물론 측근들을 심어둔 국영방송의 프로그램에 연일 출연하며 선거 유세나 다름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스캔들 제조기’ 명성 걸맞게
언론에 가십거리 제공하며
공공연한 선거유세 행보
49살 차 애인과 약혼 발표하며
미성년자 성매수 혐의를
부인하는 자리로 적극 활용
재집권 가능성은 낮다지만
긴축에 따른 국민 피로감 겨냥
몬티 총리·EU 싸잡아 비난하며
떠나간 지지율 끌어올리기 나서
북부동맹까지 내 편 만들면
민주당 과반 확보 저지 관측도
정권교체 열망이냐, 반유럽연합 확산이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탈리아의 경제를 망친데다 연이은 추문으로 국가적 망신까지 가져다준 베를루스코니의 복귀를 바라보는 안팎의 시선이 예전만큼 곱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가 속한 자유국민당의 지지율이 그의 퇴임 무렵(31%)의 반토막 수준(16.5%)으로 떨어진 게 대표적 증거다. 좌파 성향의 제1야당 민주당은 최근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승리한 데 이어, 지난 17일 이탈리아 리서치 기관 SWG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도 가장 높은 지지율(31%)을 얻고 있어, 정권 교체 기대를 높이고 있다. “좌파의 집권은 막아야 한다”며 중도 우파 진영에서 몬티의 총선 출마를 거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베를루스코니는 지난 16일 “몬티가 (중도 우파의 지도자로) 총선에 나올 결심을 한다면 다음 총선에 후보 등록을 하지 않겠다”며 또다시 유보적인 모습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된 긴축 정책에 지쳐 몬티의 출마를 반대하는 여론도 60%에 달하고 있다. 몬티는 이에 애초 21일로 예정됐던 연말 기자회견을 23일 이후로 늦추는 등 정치적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다.
베를루스코니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우려는 남는다. 그가 그동안 잃어버린 표심을 되찾기 위해 선거 캠페인을 통해 ‘반유럽연합’ 정서에 불을 댕길 것이라는 점이다. <아에프페>(AFP) 통신이 지난 10일 전한 칼럼니스트 스테파노 폴리의 말에서도 이 점은 드러난다. 폴리는 “베를루스코니를 반대하는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베를루스코니 자체가 아니라, 그가 유럽과 독일, 긴축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선거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베를루스코니는 정계 복귀 선언 뒤인 지난 11일 방송 프로그램에서 “독일이 요구한 긴축 정책을 실시하면서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며 몬티(의 개혁 정책)가 지나치게 “독일 중심적”이라는 등의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또 18일 <라이> 인터뷰에선 “유럽중앙은행(ECB)이 자금조달 금리 인하에 대한 권한을 더 갖지 못한다면 이탈리아가 유로존 탈퇴 압박을 받을 수 있다”고도 말했다. 몬티의 개혁이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경기침체와 반복되는 세금 인상, 재정 감축에 따른 피로감이 높아지면서 개혁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는 상황을 파고든 발언들이다. 이런 발언들은 한때 연정 파트너였던 북부동맹을 다시 끌어들일 수 있는 방안인 동시에, 지난 10월 지방선거 때 ‘오성운동’으로 이탈한 표를 되찾아올 수 있는 전략으로 비치고 있다. 북부동맹은 몬티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고 있으며, 오성운동의 경우 지난 10월 지방선거에서 이탈리아의 유로존 탈퇴와 부채에 대한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주장하면서 20%가량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전략이 주효해) 베를루스코니가 북부동맹의 지지를 이끌어낸다면, 조기 총선에서 (몬티의 개혁을 지지하는) 민주당 정부의 단독 과반 확보를 저지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고 <로이터> 통신은 11일 내다봤다. 베를루스코니가 몽니를 부려, 지금까지 추진해온 개혁 정책 추진의 발목을 붙잡는다면 간신히 한숨 돌린 이탈리아는 물론 재정 위기를 극복하려는 유럽연합(EU) 전체에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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