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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국

옌볜 조선족 울리는 ‘방문취업’ 사기 기승

등록 2007-01-28 20:58수정 2007-01-28 21:31

또…일그러지는 ‘코리안드림’
복도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서류뭉치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 부부의 얼굴에는 왠지 초조함이 스친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만지작거리던 한 남자는 누군가를 붙잡고 뭔가를 캐묻는다. 바닥엔 ‘한국 방문취업 성공’이라는 문구가 박힌 광고지가 흩어져 있다. 사무실에선 전화벨 소리가 요란스레 이어진다. 이 순간, 공안들이 들이닥친다. 시장통을 방불케 하던 소란스러움이 갑자기 침묵으로 변한다.

3월 한국행 보장 약속에 거액 떼여…정부 선정과정 허술해 사기 부추겨

지난 13일 중국 옌볜텔레비전이 방영한 ‘매주경제’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장면들이다. 이른바 ‘조선족 방문취업제’ 시행을 앞두고 각종 사기가 기승을 부리자 공안당국이 현장을 급습한 것이다. 한 공안이 사무실 책임자를 불러 누구한테서 사람을 모집하라는 위탁을 받았느냐고 추궁하자, 그는 전화를 받는 척하며 후다닥 꽁무니를 내뺐다. 공안당국은 이날 옌지 시내의 이 건물에서만 8개의 사기조직을 적발했다.

중국 조선족 사회가 방문취업제 홍역을 앓고 있다. 한국 정부가 3월4일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한 이 ‘한국행 티켓’을 놓고 곳곳에서 대형 사기판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과 옛소련 동포의 한국 취업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가 시행도 되기 전에 부작용을 낳고 있는 셈이다. 이러다간 과거 조선족들의 ‘코리안 드림’을 미끼로 취업사기가 횡행했던 꼴을 재연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방문취업제는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조선족들에겐 놓치기 힘든 유혹이다. 한국에 호적이나 친인척이 있어야만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친척방문제와 달리 만25살 이상의 조선족이면 누구라도 한국에 가서 일할 수 있도록 문호를 넓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에겐 5년짜리 복수비자를 발급해, 한 번 입국하면 3년 동안 체류하면서 취업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문제는 조선족들이 한꺼번에 들어올 경우 노동시장이 교란될 것을 우려한 한국 정부가 방문취업자 수를 제한한 데서 비롯한다. 해마다 모집인원을 할당하고, 한국어 시험을 치른 뒤 추첨을 통해 이를 맞추겠다는 것인데, 사기꾼들이 득달같이 이런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한국 정부가 이 모든 과정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해놓고 세부 내용을 아직 확정하지 못한 것도 이런 사기 행각을 부추긴다.

옌지에 사는 조선족 김민백(45)씨는 최근 한국 방문취업을 보장해주겠다는 한 모집업체의 말을 믿고 선뜻 수수료로 6000위안(72만원)을 줬다. 이는 김씨가 월급을 한푼도 쓰지 않고 1년 동안 모아야 만질 수 있는 거액이다. 김씨는 뒤늦게 이 모집업체가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으나, 모집업체는 이미 문을 닫고 달아난 뒤였다.

룽징에 사는 조선족 최용운(35)씨는 한국 방문취업 자격을 얻으려면 한국어 시험 공부를 해야 한다는 또다른 모집업체의 꾐에 속아 2000위안을 주고 하얼빈의 한 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선 이미 60여명의 조선족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는 얼마 뒤 비자 발급, 비행기표 예매 따위의 각종 수수료로 2만8000위안을 추가로 줬다. 방문취업제의 한국어 시험 규정을 팔아 돈을 챙기려는 이들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한국 정부의 방문취업 비자 발급을 대행하는 것처럼 꾸며 조선족을 등치는 여행사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투먼에 사는 조선족 리홍(28·여)씨는 한국 정부를 대신해 방문취업 비자 발급 업무를 하고 있다는 한 여행사에 속아 500위안의 신청비를 뜯겼다. 이런 수법으로 돈을 버는 여행사는 옌지와 룽징, 투먼, 허룽, 훈춘 등지에서도 성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문취업제 사기가 이처럼 기승을 부리자 급기야 옌볜조선족자치주가 칼을 빼들었다. 옌볜조선족자치주 공안국과 선전부는 지난 19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방문취업제 사기가 판을 치고 있다”며 불법 모집업체를 발견하면 즉각 신고하라고 당부했다. 선양 주재 한국총영사관 17일 공지를 내어 “한국 정부는 어떤 단체와 기관에도 방문취업자 모집과 선발 권한을 맡기거나 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계획이 없다”고 강조하고, 조선족들에게 한국 정부를 파는 이들의 꾐에 넘어가지 말 것을 주문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조선족 사회 ‘방문취업’에 들썩
제도는 환영, 선정방식엔 불만

중국 하얼빈에서 나오는 동포신문 <흑룡강신문>이 최근 ‘올해 조선족 사회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일까’라는 주제로 전화 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에 응한 헤이룽장·랴오닝성과 옌벤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10명 가운데 7명이 방문취업제를 꼽았다. 방문취업제가 요즘 조선족 사회의 최고의 화두로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방문취업제에 대한 조선족들의 반응은 ‘제도는 환영, 방법은 불만’으로 요약된다. 한국에 가서 일할 기회가 넓어진 것은 좋으나, 선정 방식이 조선족들에게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정 수의 방문취업자를 선정하기 위해 한국어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들을 놓고 다시 추첨하는 방식을 놓고 논란이 많다.

한국어 시험은 중국에서 이른바 조선어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에겐 골치 아픈 숙제다. 특히 농촌의 저학력자들에게 상당한 장벽이 될 수 있다. 실제 옌볜에선 지난해부터 농민들이 농사는 짓지 않고 한국어 시험 준비에 한창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일부 조선족 단체는 조선족들이 한국에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며 한국어 시험 폐지를 요구한다.

방문취업자 제한이 가수요를 촉발할 지도 모른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사기꾼들이 개입할 여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1990년대 초반 한국인들의 사기 표적이 됐던 옌볜에서 극명하게 입증된 바 있다. 200여만에 이르는 중국의 조선족 가운데 84만여명이 옌볜에 모여 산다. 이와 관련해선 과거 사기 피해자들과 조선족 사회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층이 우선적으로 방문취업제의 수혜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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