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춘화
아시아 사람들
내년으로 다가온 중국공산당 17차 전국대표대회(전당대회)를 앞두고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의 인맥들이 ‘각개약진’하며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가장 주목을 받는 건 중국공산청년단의 인맥, 이른바 ‘공청단파’들이다. ‘공청단파’란 후 주석이 중국공산청년단 제1서기를 맡고 있던 시절 인연을 맺었던 이들을 말한다. 대만 <중국시보>는 7일 전국 31개 성·시·자치구의 장관급 요직 가운데 이미 20개를 이들이 ‘점령’했다고 보도했다.
‘리틀 후진타오’ 후춘화
티베트 공작서 활약
공청단 1서기로 두각 ‘공청단파’ 가운데 최근 가장 주목을 끄는 인물은 막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된 후춘화다. 마흔세 살의 젊은 나이로 그가 공청단의 최고위직인 제1서기에 오른 걸 두고 대만과 홍콩의 매체들은 공청단에 ‘후’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고 썼다. 지금까지 공청단의 지도자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른 인물들로는 후야오방 전 총서기, 후치리 전 정협 부주석, 후진타오 주석 등인데 이들은 공청단의 ‘3후’로 불려왔다. 최근 다시 후춘화가 공청단 최고위직에 오름에 따라 그는 ‘네번째 후’라 불리고 있다. 후춘화가 주목을 끄는 건 단순히 그가 선배 ‘3후’들과 성이 같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 대륙에서 후춘화는 이미 “후진타오를 31개월 동안 모시면서 초인적인 업무 처리능력으로 후 주석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 31개월이란 티베트에서 ‘공작’하던 기간을 말한다. 1983년 베이징대학 중문과를 졸업한 후는 그해 공산당에 입당한 뒤 ‘티베트 공작’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가 평균해발 4000m의 티베트에서 악전고투를 치른 지 5년이 되던 1988년 후진타오가 티베트 서기로 날아온다. 후춘화는 1987년부터 24살 약관의 나이에 티베트공청단 부서기라는 요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두 후씨는 이미 ‘공청단 인맥’으로 공감대가 흐르던 사이였다. 1989년 3월 티베트에서 스님들 주도로 독립 요구 시위가 벌어졌을 때, 이를 강경 진압함으로써 후진타오가 덩샤오핑의 눈에 쏙 들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후춘화는 이 때 후진타오를 그림자처럼 보필함으로써 후진타오의 눈에 쏙 들었다. 1992년 티베트에서 고산병 증세를 얻은 뒤 중앙으로 다시 돌아간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당시 29살이던 후춘화를 티베트공청단 서기로 강력하게 천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7년 후춘화가 공청단 중앙에 진출해 서기처 서기를 맡은 것도 후진타오가 든든한 배경이 됐다. 천량위 전 상하이 서기의 제거로 ‘상하이방’이 휘청거리는 사이 후 주석이 신임하는 젊은 인물들이 빈 자리를 메우면서 중국공산당은 좀더 젊어지고 있다. <중국시보>는 이전의 ‘태자당’들에 비해 ‘공청단파’ 인맥이 ‘평민’ 출신인 점이 새롭다고 썼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티베트 공작서 활약
공청단 1서기로 두각 ‘공청단파’ 가운데 최근 가장 주목을 끄는 인물은 막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된 후춘화다. 마흔세 살의 젊은 나이로 그가 공청단의 최고위직인 제1서기에 오른 걸 두고 대만과 홍콩의 매체들은 공청단에 ‘후’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고 썼다. 지금까지 공청단의 지도자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른 인물들로는 후야오방 전 총서기, 후치리 전 정협 부주석, 후진타오 주석 등인데 이들은 공청단의 ‘3후’로 불려왔다. 최근 다시 후춘화가 공청단 최고위직에 오름에 따라 그는 ‘네번째 후’라 불리고 있다. 후춘화가 주목을 끄는 건 단순히 그가 선배 ‘3후’들과 성이 같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 대륙에서 후춘화는 이미 “후진타오를 31개월 동안 모시면서 초인적인 업무 처리능력으로 후 주석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 31개월이란 티베트에서 ‘공작’하던 기간을 말한다. 1983년 베이징대학 중문과를 졸업한 후는 그해 공산당에 입당한 뒤 ‘티베트 공작’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가 평균해발 4000m의 티베트에서 악전고투를 치른 지 5년이 되던 1988년 후진타오가 티베트 서기로 날아온다. 후춘화는 1987년부터 24살 약관의 나이에 티베트공청단 부서기라는 요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두 후씨는 이미 ‘공청단 인맥’으로 공감대가 흐르던 사이였다. 1989년 3월 티베트에서 스님들 주도로 독립 요구 시위가 벌어졌을 때, 이를 강경 진압함으로써 후진타오가 덩샤오핑의 눈에 쏙 들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후춘화는 이 때 후진타오를 그림자처럼 보필함으로써 후진타오의 눈에 쏙 들었다. 1992년 티베트에서 고산병 증세를 얻은 뒤 중앙으로 다시 돌아간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당시 29살이던 후춘화를 티베트공청단 서기로 강력하게 천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7년 후춘화가 공청단 중앙에 진출해 서기처 서기를 맡은 것도 후진타오가 든든한 배경이 됐다. 천량위 전 상하이 서기의 제거로 ‘상하이방’이 휘청거리는 사이 후 주석이 신임하는 젊은 인물들이 빈 자리를 메우면서 중국공산당은 좀더 젊어지고 있다. <중국시보>는 이전의 ‘태자당’들에 비해 ‘공청단파’ 인맥이 ‘평민’ 출신인 점이 새롭다고 썼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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