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7일 일본 이시가키섬에 입항한 미군 함정에 반대하는 오키나와 주민의 시위 모습. AP 연합뉴스
지난 문재인 정부와 현 윤석열 정부 사이에 노골적이리만치 유사한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군비의 고공행진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군비 증강에 적극적이었다. 2017년 40조3천억원이었던 국방 예산은 2022년 54조6천억원으로 늘었다. 임기 내 35.5%나 오른 것이다. 이런 추세는 내년에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부는 올해(57조143억원)보다 4.5% 증가한 59조6천억원을 2024년 국방 예산으로 편성했다. 공공임대주택, 어린이재활병원 건립, 어린이집 확충, 청소년 학교폭력 예방, 취약계층 고용장려금 등 예산이 대폭 축소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 장기화되는 과정에서 폴란드에 K2 전차 980대, K9 자주포 670문 등 무기 수출계약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판매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최근 폴란드 정권 교체로 계약 무산 가능성이 높아지긴 했지만, ‘케이(K)-방산’이란 말이 나올 만큼 방위산업 육성은 국가적 프로젝트가 된 듯하다. 세계 군사력 평가기관 ‘글로벌 파이어파워’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 6위다.
동아시아 전역의 군비 증강 움직임이 고삐 풀린 말처럼 번지고 있다. 북-미 협상이 무산된 이후 북한은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2015년 이후 북한은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통해 그것을 가속화했으며, 2017년부터는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하고 있다. 2021년 1월9일에는 “국가핵무력의 완성”을 공식화했으며, 올해 3월에도 모의 핵탄두를 장착한 전략순항미사일 발사 훈련을 전개했다. 이 훈련은 한·미·일 군사훈련에 대한 맞대응 성격으로 이뤄졌다.
동아시아 군비 경쟁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은 난세이제도에 대공미사일 기지를 무제한적으로 증강하면서 군비를 가파르게 늘리고, 역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요나구니 등 여러 섬들에 각각 수백명 규모의 미사일부대들을 배치했고, 수백년간 목장으로 이용되던 마게섬 역시 미군기지가 됐다. 미군은 이 섬을 항공모함 이착륙 훈련지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올해 일본의 군비는 전년에 비해 26%나 늘어난 6조8천억엔(약 62조원)에 이르렀는데, 설상가상으로 일본 정부는 ‘국가안전보장 전략’을 개정해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1%에서 2%로 늘리기로 했다. 중국 역시 올해 3월 초 국방 예산을 전년 대비 7.2% 증가한 1조5537억위안으로 책정했다. 이는 한국 국방비 57조원의 약 5배, 일본의 4배다. 2011년 ‘아시아로의 회귀’ 이후 10여년 만에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에 군사력을 집중했고, 중국 역시 일대일로와 중국몽 등 지정학적인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대외 정책을 추진해왔다. 나아가 인민해방군은 전투기 개발과 우주정거장 등 첨단기술을 활용한 군사력 강화, 핵탄두 보유량 확대 역시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 각국은 모두의 평화를 위협하는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고, 남북의 군비 증강은 전쟁 위기의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과 중국의 ‘중국몽’ 구상 등 강대국 패권전략이 낳은 결과이자, 지난 시기 우리의 신자유주의화된 통일 담론이 실패했음을 가리킨다. 보수건 진보건 가리지 않고 “통일은 대박”이라는 구호를 내재화하고 자본의 이윤을 위한 비현실적 통일을 도모해오지 않았던가.
한국전쟁 정전 70년을 맞는 시기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아무리 봐도 ‘비핵화 협상’은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포기하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영원히 불가능한 목표가 될 것이다. 평화연구자 정욱식은 저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에서 “전쟁 방지나 긴장 완화, 상호 간 위협 감소 조치 등 여건을 하나씩 만들고, 군축이나 제재 해결 등 과제들을 시야에 넣은 채로 추진해나가면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간 비핵화 협상이 과거의 실패로부터 아무런 반성도 없이 잘못된 절제를 반복해왔다는 것이다. 한·미·일은 자국 군비는 늘리면서 북한에만 핵무기를 일거에 소거하라고만 요구할 게 아니라, 동시적이고 단계적으로 ‘상호 군축’을 협의하고, 그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무너진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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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일본 오키나와현 나하시에선 1만명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는 미·일 양국의 오키나와 군사화 전략에 반대하고 대화를 통한 평화를 구축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지난해 일본 정부가 ‘안보 3대 문서’를 개정(‘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하는 내용)한 이래 오키나와 시민사회는 난세이제도의 군사기지화를 비판해왔다. 집회 현장에서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는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공습과 학살을 언급하며 “위기를 피할 곳이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오키나와 민중이 일어나 평화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일본 전역과 그 너머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 집회엔 한국 사회운동단체 플랫폼씨(C)나 미국 디에스에이(DSA) 등의 연대 메시지들도 공유됐다. 오키나와 문제 해결이 단순히 오키나와 주민들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와 대만 시민사회의 연대가 꾸준히 도모됐으며 “오키나와나 대만을 축으로, 비정부기구 차원에서 환경·안전보장·평화의 문제를 고민하는 조직을 만들자”는 진지한 구상도 제안됐다. 국제정치 연구자 하바 구미코는 1975년 유럽의 사회단체와 지방 도시들이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설립했던 것을 사례로 든다. 동북아 시민사회 역시 오키나와를 허브로 삼아 평화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이런 제안을 더 적극적으로 사유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힘없는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논자들은 ‘더 많은 무기만이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오히려 그것이 초래한 끔찍한 비극과 참상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 이전 국가들 간의 군비 경쟁은 전쟁을 야기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더 강하고 많은 무기는 오히려 악무한의 치킨게임과 더 큰 전쟁, 파괴를 예고할 뿐이다.
한 나라의 대외정책과 국방정책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요소는 바로 여론이다. 전쟁 위기 극복을 위해 동아시아의 평범한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민간의 반전평화 네트워크를 세워야 할 절실한 이유가 여기 있다. 군비 경쟁에 맞서 평화 여론을 구축해 우리 모두의 일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