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경찰이 24일 텔아비브에서 정부의 사법개편안 추진에 반대하는 시위대에 물대포를 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극우 성향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정부가 24일(현지시각) 야당과 시민들의 7개월여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 끝내 사법부의 권한을 줄이는 내용의 사법제도 개편안 일부를 통과시켰다. 이날 ‘합리적 기준 법안’으로 불리는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이스라엘 사법부는 정부의 독주를 막을 견제 장치를 상당 부분 잃게 됐다.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고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짚어본다.
네타냐후 총리의 리쿠르드당은 극우 국가주의 세력 및 극우 정통파 유대교 세력의 지지를 받아 지난해 말 연립 정부를 세웠다. 이스라엘 사상 가장 극우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네타냐후 내각은 지난 1월 여당의 권한을 강화하고 사법부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사법 개편안을 추진해왔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대법원은 정부 정책을 “비합리적”이란 이유로 막을 권한이 있었다. 사법부의 이런 권한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의회에서 야당이 집권당의 독주를 막을 합법적 방법이 거의 없는 이스라엘 같은 나라에서 거의 유일한 정부 견제 장치”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네타냐후 총리 지지자들은 “선출되지 않은 법관 권력이 선출된 정부보다 우위에 서는 건 비민주적”이라며 “사법부 권력이 과도하다”고 반박해 왔다.
이번 조처로 이제 대법원은 정부 정책에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제동을 걸 수 없게 됐으며, 정부는 더 많은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네타냐후 총리와 극우 정당의 연립정부가 추진하는 사법제도 개편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안이 더 있다. 하나는 의회에 대법원의 결정을 무효화할 권한을 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부(또는 의회)가 법관 임명의 최종 승인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애초 집권 연정세력은 법안을 한꺼번에 처리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법개편안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커지자, 네타냐후 총리는 야당과 대화하겠다며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야당과의 협상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이번에 ‘합리적 기준 법안’을 먼저 강행 처리한 것이다.
집권 연정세력은 올가을 남은 두 가지 사법개편안도 처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사법개편 법안의 설계자로 꼽히는 야리브 레빈 법무부 장관도 이번 사법개편안 통과 뒤 “사법제도를 개편하기 위한 역사적 첫 조처를 했다”며 곧 추가적인 입법을 추진할 것임을 예고했다.
이번 조처로 네타냐후 총리는 극우 정통파 유대교 지도자인 아리에 데리의 입각을 다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네타냐후 정부의 연정 파트너인 샤스당의 대표인 데리는 지난해 말 내무부 장관에 임명됐으나, 대법원은 지난 1월 “비합리적 인선”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데리 대표가 2002년 뇌물수수 혐의로 복역했고 올해 초엔 탈세 혐의를 인정한 뒤 공직에서 은퇴하겠다고 밝혔다는 이유 때문이다.
극우 연정이 추진해온 유대인 정착촌 확대 등 논란 많은 팔레스타인 정책은 더욱 내부 견제 없이 추진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동안 극우 세력은 “진보 성향의 법관들이 우익 정치세력이 추진하는 의제와 정책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려왔다.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극우 세력 중에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모두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네타냐후 총리의 극우 세력이 힘으로 몰아붙이는 이런 조처가 이스라엘을 더욱 분열과 대립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스라엘 시민들은 사법제도 개편안을 반대하며 7개월 동안 거리로 뛰어나오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도 반정부 시위를 이어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150여개 대형 기업과 은행 등이 참여하는 이스라엘 비즈니스 포럼은 이날 하루 총파업을 선언했으며, 회원 수 80만명의 최대 노동운동 단체인 히스타드루트(이스라엘 노동자총연맹)도 총파업을 예고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내어 “이스라엘의 평생 친구인 조 바이든 대통령은 그동안 민주주의에서 주요한 변화가 계속되려면 가능한 광범위한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밝혀왔다”며 “오늘 표결이 가능한 가장 적은 수의 찬성으로 진행된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에 보낸 성명에서 “현재의 사법개편이 더 분열되고 있다”며 “이스라엘이 직면한 다양한 위협과 도전을 고려할 때 이 사안을 서둘러 처리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그동안 네타냐후 정부의 극우 성향을 경계해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를 보여왔다. 지난해 말 재집권한 네타냐후 총리는 최근 들어서야 비로소 바이든 대통령의 백악관 초청을 받았지만, 아직 구체 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사법개편안 강행 처리가 네타냐후 총리의 방미 일정에 어떤 영향을 줄지 주목된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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