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대선 후보인 사회주의자 페드로 카스티요가 5월30일 결선투표를 앞두고 열린 후보 간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아레키파/AFP 연합뉴스
안데스 산간 빈농의 아들은 ‘독재자의 딸’을 넘어 뜻을 이룰 수 있을까.
6일 치러진 페루 대선 결선투표의 관전 포인트는 ‘깜짝’ 부상한 좌파 성향의 페드로 카스티요(51) 자유페루당 후보와 우파 성향의 게이코 후지모리(45) 국민권력당 후보 간 맞대결이다. 막판 판세는 카스티요의 오차범위 내 우세를, 후지모리가 거세게 추격하는 ‘살얼음판’ 승부다. 결과는 이르면 7일 나올 수 있지만 근소한 차이라면 최종 결과 발표에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
카스티요 후보는 빈농 출신의 정치 신인. 그는 지난 4월 대선 1차 투표 이전까지만 해도 전국 정치무대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신인이었다. 페루 북부 카하마르카의 작은 도시 푸냐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뒤 25년 동안 고향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정치 경력이라곤 2002년 지방 소도시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게 전부다. 2017년에 페루 교사들의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한 총파업을 주도하면서 그나마 페루의 유력 언론에 이름을 올렸지만, 전국 정치무대에 명함을 내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낮은 인지도는 이번 대선 1차 투표를 앞두고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났다. 지난해 말부터 1차 투표에 입후보한 18명을 대상으로 여러차례 여론조사가 이뤄졌지만, 한차례도 상위 6위 안에 든 적이 없다고 <비비시>(BBC) 방송은 전했다. 지난 3월 중순까지 지지율이 3%를 넘은 적도 없다.
국민권력당의 대선 후보 게이코 후지모리(왼쪽)와 자유페루당의 페드로 카스티요가 5월30일 대선 토론회를 앞두고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아레키파/AFP 연합뉴스
안데스 빈농들의 ‘깜짝’ 몰표…단숨에 1위 ‘기염’
그러나 막상 4월11일 대선 1차 투표의 뚜껑이 열리자, 그동안 ‘숨어 있던’ 표가 극적으로 쏟아지면서 19% 득표로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개표 분석 결과, 숨어 있던 표는 주로 페루 남부 안데스 산간 지역의 시골 빈농들에게서 나왔다. 통상 ‘깊은 페루’로 일컬어지는 아푸리막과 아야쿠초, 우앙카벨리카 등에서 50% 남짓한 뭉텅이 지지표가 나온 것이다.
오랫동안 페루 정치무대의 변방이었고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됐던 내륙 산간 시골의 빈농들은 왜 카스티요에게 표를 몰아준 것일까. 고질적인 정치적 부패와 무능, 경제적 불평등과 빈부격차 같은 문제들이 극에 달하면서, 기층민의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개혁 열망이 ‘참신한’ 정치 신인에게 투영된 것이란 해석이 많다.
페루는 1990년부터 2019년까지 중남미에서 칠레 다음으로 높은 연평균 4.3%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비교적 모범적인 성장을 했다. 빈곤율도 2009년 67%에서 2019년엔 41%로 줄이는 등 빈곤 퇴치에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낙관적인 밝은 수치 뒤엔 극심한 빈부격차와 불평등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카스티요에게 몰표를 던진 우앙카벨리카의 주민들은 수도 리마보다 평균수명이 7년이나 짧다. 카스티요의 고향인 푸냐의 유아 사망률은 리마의 3배에 가깝다.
극심한 불균형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더욱 심각해졌다. 정부는 효과적인 방역대책을 내놓지 못해, 코로나19 사망자가 인구(약 3300만명) 대비 세계 최다인 18만여명에 이르는 비극을 겪었다. 그 영향으로 경제도 지난해 중남미에서 가장 낮은 -11% 성장을 기록하면서 ‘없는’ 이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혼란과 불안을 자초하며 부담을 가중시켰다. 최근 5년 사이에 대통령이 무려 5번이나 바뀌었다. 모두 부패 혐의로 조사받았거나 수감됐고 한명은 경찰 수사망이 조여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해 11월엔 의회의 대통령 탄핵에 반발한 시민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임시 대통령이 닷새 만에 사퇴하는 등 정치 불안이 극에 달했다.
중첩된 위기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기층민이 기존 정치에 강력한 불신을 표출하며, 빈농 출신이고 기성 정치권과 거리가 먼 카스티요에게 변화와 개혁의 기대감을 드러낸 게 1차 투표에서 카스티요가 ‘깜짝’ 부상한 배경으로 보인다. 산타마리아 가톨릭대학의 곤살로 반다 교수는 “감염병 확산과 빈곤의 급증이 기존 질서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극적인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자유페루당의 대선 후보 페드로 카스티요가 5월30일 대선 토론회에서 후보 간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한 신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아레키파/AFP 연합뉴스
광산 자본·우파 세력 “카스티요 안 된다” 결집
카스티요가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하자, 페루의 주가와 화폐 ‘솔’의 가치가 급락하는 등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카스티요 후보가 집권하면 페루 경제의 핵심 산업인 광산업을 지배하는 다국적기업 등 국내외 자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가 소속된 자유페루당은 다국적기업에 광산 운영 수익의 80%를 정부에 사용료로 내야 한다고 밝히고 이를 어길 경우 국유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보도했다. 이에 대해 카스티요 후보는 “국유화 추진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도 다국적기업들의 광산 사용료와 세금을 인상해 교육과 의료 등 복지 재정 확충에 사용하겠다는 뜻은 분명히 했다. 그는 또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철권통치를 휘둘렀던 1993년 제정된 헌법을 바꾸기 위해 제헌의회를 구성하겠다는 의지도 거듭 확인하고 있다.
카스티요가 집권하려면, 우선 대선 도전만 세번째인 게이코 후지모리를 넘어서야 한다. 그는 1990∼2000년 집권한 독재자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장녀로, 2011년과 2016년 대선에서 결선까지 진출했으나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다. 아버지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언론과 야권 탄압으로 비판받고 있으며, 현재 인권 침해와 부패 혐의로 2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돼 있다. 게이코 후지모리 후보 자신도 브라질 건설업체 오데브레히트에서 뇌물을 받고 돈세탁한 혐의로 13개월 동안 구속됐다가 지난해 보석으로 풀려난 뒤 1차 투표에서 13% 득표로 2위를 했다.
그는 뇌물수수에 연루된 부패 정치인 이미지가 강한데다 아버지 집권 시절 독재와 부패에 대한 국민의 거부 정서도 여전히 남아 있어, 이번 대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 대선 1차 투표 직후인 4월 중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카스티요는 41% 대 26%로 후지모리를 크게 앞섰다.
그러나 카스티요의 집권 가능성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온 국내외 자본과 우파 정치세력이 서서히 결집하면서, 막판 살얼음판 승부로 바뀌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지난 4월18일 언론 기고에서 두 후보 중 “후지모리가 차악이며 그래도 우리 민주주의를 지킬 가능성이 더 크다”며 후지모리 지지를 호소했다. 이는 그동안 대선 때마다 후지모리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던 입장을 번복한 것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지난달 23일 반군 ‘빛나는 길’이 안데스 산골 마을에 침입해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 16명을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것도 여론의 보수적인 심리를 자극했다.
페드로 카스티요 후보의 지지자가 6월1일 리마 산마르틴광장에서 커다란 노란 연필 모양의 교사 노조 상징을 들고 카스티요 지지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리마/EPA 연합뉴스
막판 후지모리 추격 거세…살얼음 판세로 바뀌어
선거 판세는 막판까지 우열을 쉽게 점치기 어려운 접전이다. 지난달 28일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의 여론조사를 보면, 카스티요는 40.8%로 후지모리(38.3%)를 오차범위 안에서 앞서고 있다. 일주일 전인 23일 조사 때 카스티요가 44.8%, 후지모리가 34.4%로 10.4%포인트 격차였던 것과 비교하면, 후지모리의 막판 기세가 뚜렷하다.
카스티요가 막판 후지모리의 추격을 뿌리치고 집권에 성공하더라도 자신의 의제를 정책으로 관철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지난해 4월 구성된 국회에서 카스티요의 자유페루당은 제1당이 됐지만, 점유 의석은 전체 130석 중 37석에 그친다. 카스티요와 자유페루당이 다른 당의 협조를 끌어내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카스티요를 대통령으로 밀어 올린 빈농 등 소외 계층의 꿈은 물거품이 될 가능성도 있다.
‘후(who) 스토리’는 국제적 이슈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조명하는 <한겨레> 국제부의 새 연재입니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