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전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얼마 전 우루과이로 이민을 떠난 친구 가족이 그곳에서 대통령을 지낸 호세 무히카를 만나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84살의 순박한 시골 농부 할아버지와 함께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유엔 연설 때나 오바마와 푸틴을 만날 때나,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대통령 취임식이나 퇴임식에서도 보았던 노타이의 허름한 작업복, 낡고 줄도 세우지 않은 통바지, 싸구려 운동화, 평생 세수를 하지 않은 듯한 푸석한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칼 그대로였다.
국회의원이나 장관은 물론 대통령이었을 때도 농사일을 계속하던 스무 평의 낡고 누추한 오두막, 후줄근한 옷들이 빨랫줄에 걸린 잡초투성이 앞마당의 풍경이 떠올랐다. 비서나 경호원은커녕 부인이나 자녀도 없이(무자녀), 다리 저는 개와 함께 다니며, 손수 장비를 들고 이웃집을 수리하기도 한 그는 간디 이후 자발적 가난으로 산 유일한 지도자다. 월급의 90%를 빈민주택기금으로 기부하고 남은 액수도 국민 평균소득 80만원보다 많다고 하며, 유일한 재산인 낡은 차로 출퇴근하는 길에 히치하이커들을 태워주고, 단 한번의 비리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었다.
정치가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은 그들이 봉사하고자 하고 대표하고자 하는 다수의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다수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았다. 최고의 정치는 정직이라고 하면서 대통령도 누구도 숭배하지 말라고 한 그는 누구보다도 빈민의 벗이었다. 우루과이 인명사전에 그는 그냥 ‘농부’로 기록되어 있다.
도시 게릴라 출신의 민주주의자
우루과이는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처럼 1516년 이래 300여년간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다가 19세기 중엽에 와서야 독립했지만, 20세기 초에는 기간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 노인연금, 교육제도 개혁과 같은 오늘날 우루과이가 자랑하는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를 이룩해 ‘남미의 스위스’라고 불렸다. 무히카가 태어나기 5년 전인 1930년,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첫 월드컵대회를 개최했을 정도로 선진국이었고, 당시 10대의 무히카도 사이클 선수로 출전했다.
그러나 1970년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집권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않고 독재정권에 맞서 도시게릴라 활동에 뛰어들어 ‘로빈후드’로 불린 무히카는 37살이었던 1972년에 투옥되어 50살이 된 1985년 민정 이양 후 석방되기까지 무려 1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그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거듭났다. 뒤에 그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추천된 이유는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게릴라에서 민주주의자로 부활했다는 점이었다. 진보세력을 단결시킨 민중참여운동을 거쳐 1994년 하원의원, 1999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고 2005년에 출발한 바스케스 민주정권에서 농축수산부 장관을 지낸 뒤 2010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지난 6월초 <한겨레> 독자 공광준씨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인근에서 열린 ‘프렌테 암플리오’(광역전선) 연설집회에서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었다. 공광준 제공
그 자신 가장 존경한 ‘체 게바라 이후 가장 위대한 남미 지도자’로 불리면서도 극단적 사고로는 변화가 불가능하고 참된 혁명은 사고의 전환이라고 주장하며 철저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로 보수적 경제정책과 진보적 사회정책을 동시에 추진해 경제성장률과 교육수준 및 사회적 포용을 높였다. 간접세를 대폭 줄이는 반면 부유세와 기업세 같은 직접세를 대폭 늘리는 등의 조세개혁과 분배개선을 비롯한 전면 개혁도 성숙한 정치시스템과 정책적 안정성으로 이룩한 그는 국영화보다 민중의 자치경영을 선호했다.
특히 가톨릭의 치열한 반대를 무릅쓰고 재임 중 마리화나를 합법화하면서도 위험한 마약중독자를 강제 입원시킬 수 있도록 했고, 세계에서 열두번째로 동성결혼법을 제정하고 낙태허용법도 제정하는 등 인권 신장에도 앞장섰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통합 정책도 활발히 펼쳤다. 무엇보다 핵발전소 없이 대부분의 전력을 수력, 풍력, 태양력으로 생산하여 청정에너지 국가, 핵 청정 국가로 만들었다.
최악의 협상도 최선의 전쟁보다는 낫고 평화를 깨뜨리지 않으려면 인내심을 키워야 한다며 미국과 쿠바의 중재에 나서서 성공했다. 부패, 문맹, 극빈층을 줄여 레임덕은커녕 취임 때보다 퇴임 후의 지지율(65%)이 더 높았지만 재출마 요구를 완강히 거절하고 농부로 돌아갔다. “나는 농부다.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그렇다. 땅에서 일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고 그는 자주 말했다. 그리고 “난 인생을 간소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런 삶이 주는 여유가 좋다”고 했다.
2013년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는 우리가 검소와 절제, 모든 자연의 주기에 어긋난 문명을 살고 있지만 더 나쁜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문명, 즉 인간관계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을 빼앗기는 문명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라고 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사랑, 우정, 모험, 연대, 그리고 가족이라고 역설했다. 그래서 오로지 최소한의 필요에 만족하는 가난한 삶을 선택해 살면서 경제성장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는커녕 도리어 세상을 망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에게 붙여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말을 부정하며, 정말 가난한 사람이란 조금밖에 갖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의 사람들처럼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언제나 우리 모두의 삶이 기적이고 삶의 모든 기회가 기적이라며 가장 심플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그는, 부와 성장을 향한 욕망에 근거하여 오로지 무한 소비를 위해 노동 착취를 강요하는 시장경제가 삶을 착취한다고 비판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미국인들처럼 소비하려고 하면 지구가 몇 개나 더 필요하다면서 유엔 등에서, 특히 강대국 지도자들 앞에서 소비주의가 세상을 망친다고 하면서 그들이 소비하는 분당 200만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세계군사비라면 아프리카 기아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도 했다. 우루과이에서는 전차를 없애서 포병이 없을 정도로 군사비를 줄이고 모병제를 실시했다.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 생명도 고려해야”
무히카 이전에 내가 사랑한 우루과이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무히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우루과이의 국가적 정체성인 간소함의 뿌리 깊은 바탕을 그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갈레아노는 여러 책에서 콜럼버스의 침탈(발견이 아니라) 이후 서구가 남미를 500년 이상 착취한 역사를 계속 묘사하며 특히 자연을 파괴한 자본주의의 오만을 비판했다. 그는 그것이 남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전체의 문제이고, 단순한 환경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라고 하면서 정치적 통제에 의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히카도 “이제 문명 프로젝트의 화두는 생명이다.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동식물의 생명을 함께 문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단지 조금 더 떳떳한, 조금 덜 부끄러운 나라를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먼저입니다”라고 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 가장 소중한 것이고, 진정한 자유는 적게 소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좌절하지 않고 계속 걷는 것, 새롭게 시작하는 용기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했던 그의 말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도 소중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결코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그밖의 다른 것은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라는 그의 말에 나는 공감한다.
내 친구는 마지막으로 최근 우루과이 경제가 나빠지면서 무히카에 대한 관심도 낮아진다는 이야기를 망설이듯 전했지만, 내게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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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