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 사랑한 천재들>이라는 책에서 6명의 ‘천재’ 중 하나로 존 케이지가 나와서 반가워하다가, 그가 ‘부당하게도 사기꾼이나 아나키스트로 폄훼되었다’는 문장을 읽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케이지는 사기꾼은 아니지만, 자타공인의 아나키스트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아나키스트라고 하는 것이 폄훼인가? 게다가 그가 아나키스트임을 자타가 인정하는데도 왜 그렇게 말하는가? 1960년대, 특히 1965년부터 케이지는 그의 모든 저술에서, 자율성을 위해 사라져야 하는 강제적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러나, 케이지를 오로지 천재라고 찬양하는 이 책에는 케이지가 무엇보다도 중시한 자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한국 유일의 ‘천재 연구자’라는 위 책의 저자에게 천재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특별한 재주인 모양이다.
나는 천재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게 불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도 강렬한 자유, 특히 개성의 추구라고 본다. 그것은 음악가의 자유만이 아니라 음악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케이지 음악은 연주장에서의 모든 참가자의 평등, 지휘자와 같은 권위자의 부재, 어떤 공연 장소도 다른 공연장과 마찬가지라는 생각, 청중을 가두지 않고 그들이 원할 때에는 언제나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존중한다는 점 등에서 특징적이다. 그런 특징 때문에 케이지 음악을 단적으로 아나키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 책에는 그런 케이지 음악의 특징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내가 이 글을 굳이 쓰려고 하는 이유는 음악은 아나키적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연주회에 자주 가지 않는다. 독재자와 같은 지휘자를 보기가 싫고, 듣기 싫어도 꼿꼿이 앉아서 끝까지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장을 해야 하거나, 연주 중간에 박수를 치거나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점도 물론 싫어한다. 나이가 든 탓인지 요즘에는 하품도 많이 하고 졸기도 해서 더욱더 공연장에 가기 싫다. 이런 나를 구해주는 사람이 케이지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왼쪽)과 함께한 존 케이지(1972년). 아트센터 숨 제공
케이지는 191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나 디트로이트와 앤아버에서 자랐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으나 특별하게 음악에 재능을 보이지는 않아 별난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독서에 묻혀 산 탓에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 그는 학교 교육에 반항했다. 가령 고등학교 웅변대회에서 입상한 ‘다른 사람들은 생각한다’라는 글에서 그는 미국과 남미 문화가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가치를 인정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남미 국가를 착취하는 미국의 자본가를 비판했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 기록에는 급진적인 경향이 있음이 적혀 있다. 그에게는 대학도 마찬가지여서 일찍 중퇴하고, 1년 반 유럽을 무전여행한 뒤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돈을 벌며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특히 쇤베르크에게 무료로 2년간 음악을 배웠다. 그리고 무용 안무를 위한 음악 작곡을 시작으로 머스 커닝햄과의 협업 등으로 명성을 쌓았으나,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평생의 반려였던 커닝햄과 함께 뉴욕의 맨 위층 아파트에 살면서 하루 종일 거리의 소음을 즐겨 들었고, 식사도 스스로 해결했다.
케이지를 ‘음악사의 피카소’로 만든 작품은 1952년의 작품 <4분33초>였다. 피아노 앞에 피아니스트가 앉아 건반 뚜껑을 열었다 닫으며 시간을 잰다.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악보를 폈다가 닫기도 한다. 그렇게 4분33초의 침묵이 흐른 뒤에 끝이다. 그것은 피아노나 피아니스트가 아니어도 좋다. 콘서트홀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가 지금 보는 유튜브 연주 실황 처음에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음악이다”라는 케이지의 말이 나온다. 1960년대부터 점점 더 유명해짐에 따라 그의 관심은 작곡과 공연에서 사회적 문제를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우려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예는 그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1958)의 초기 공연에서 원하는 소리를 연주하는 음악가의 설명에 나타난다. “나는 사람들이 어리석게 되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들의 자유가 그들을 고귀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나의 문제는 음악적이라기보다 사회적인 문제다.” ‘4분33초의 제2번’이라는 부제가 붙은 1965년의 <0분00초> 공연에는 연주회장에 여러 대의 스피커를 설치하여 케이지가 2층에 앉아 타자기로 편지를 쓰고 물을 마시며 의자를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침을 삼키는 온갖 소리 등을 증폭해 들려주었다. 그는 모든 소리는 조화롭다고 했다. 잡초가 없듯이 잡음도 없다.
그 뒤 케이지는 권력의 문제와 그 잠재적인 부정적 영향을 고려하고 인간이 함께 살고 일하는 책임을 추구하고자 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 강렬한 변화와 혁명은 우리의 개성을 박탈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수단의 변화다. 현재 통제는 정치와 경제와 관련된 강제적 통제이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 강렬한 개인주의와 개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희망은 현재 우리 사회의 강압적이고 관료적인 힘이 줄어들고 결국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혁명은 모든 강제적 관계의
파괴다. 그것은 그룹, 코뮌, 지역의 자율성이다. 혁명은 형제애에 대한 열망, 개인과 집단의 이익, 생산과 방위의 필요에 의해 초래된 자유 연합이다. 혁명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아이디어, 희망 및 취향에 기초한 수많은 자유 그룹의 구성이다.” 케이지는 다른 아나키스트들처럼 자치를 위해 강제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언급했지만, 다른 아나키스트들보다 개성을 더욱 강조한 점에서 소로와 유사했다. 1985년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아나키스트다. 형용사가 순수하고 단순한지, 철학적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정부는 싫어! 그리고 나는 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좋은 제도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고 했다. 1992년 8월, 80회 생일 며칠 전에 뇌졸중으로 죽기까지 그는 권력과 무관한 철저한 자유인으로 살았다.
주말뉴스 <s-레터>로 손쉽게 보세요.
☞구독하기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51115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