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군 전략폭격기 B-1B 랜서가 8일 한반도 상공에서 무력시위를 하기 위해 괌의 앤더슨기지를 이륙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일(현지시각) 북한에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며 강도 높은 경고성 발언을 내놓은 배경에는 달라진 북한의 위협도 평가에 따른 위기감,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압박까지 고려한 포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말폭탄’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갈등 구조를 고착화하고 불확실성을 높이는 신중치 못한 행동이라는 비판이 미국 내에서도 쏟아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대북 강경 발언은 취임 이후 수위가 가장 높은 것이다. 지금까지는 “모든 선택지가 테이블 위에 있다”는 수준이었다. ‘군사행동’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식의 간접적 경고 성격이 짙었다. 이번엔 자극적 어휘들을 동원해 위협 수위를 한껏 끌어올렸다.
이런 발언은 북한이 소형 핵탄두 개발에 성공했다는 미 국방부 내부 평가를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한 것과 시점상 밀접히 연관돼 있다. 보도가 나온 지 1시간여 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출입 기자들을 상대로 아편 문제와 관련한 성명을 읽었다. 이어 기자들이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대해 언급할 것이 있냐’고 질문하자 “화염과 분노” 답변을 내놨다. 질문에 답하면서 흘깃흘깃 아래를 본 점에 비춰보면, 사전에 준비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북한이 최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제재 결의 통과 등을 놓고 미국 행정부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여온 점도 트럼프 대통령의 ‘지고는 못 사는’ 불같은 기질을 자극했을 수 있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6일 “(미국) 본토가 상상할 수 없는 불바다 속에 빠져들게 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이튿날 정부 성명에서 “미국이 경거망동한다면 그 어떤 최후 수단도 서슴지 않고 불사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맞서 북한의 ‘불바다’ 발언까지 모방하며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점을 과시하려 했을 수 있다.
중국이나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염두에 뒀다는 풀이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통과를 상당한 성과로 자랑해왔지만, 최근 언론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비협조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잇따라 나왔다. 긴장감 조성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에 대북 제재를 충실히 이행하라고 겁박하려는 의도도 담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 언론 등 조야에서는 트럼프의 발언이 2차대전 이후 미 대통령으로서는 전쟁을 시사한 전례없는 표현이라며 일제히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미 언론들은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 허풍과 위협을 일삼는 북한 지도자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졌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뉴욕타임스>는 “세계가 보지못했던 화염과 분노”에 북한이 직면할 것이라는 트럼프의 발언은 미국 현대사에서 전례가 없는 대통령의 표현이라고 역사학자 등을 인용해 지적했다. 신문은 이런 발언은 해외 분쟁에 대해 대통령이 신중히 발언해 온 수십년의 역사와는 명백한 단절이라고 비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설에서 ’트럼프의 화염과 분노 위협은 말 폭탄’이라는 사설에서 트럼프의 발언은 무모하고 불필요하다며 “미국에 대한 김정은의 통상적인 광적이고 과장된 비난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신문은 “세계의 최강대국 대통령이 그런 수준으로 떨어지기를 원하는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미 의회에서 군사강경파를 대표하는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 국방위원장도 애리조나의 라디오 방송국 <케이티에이아르>(KTAR)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종류의 표현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며 “트럼프가 말하는 것을 해석하기를 오래 전에 포기했다”고 비판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정의길 선임기자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