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반대하는 한 여성이 뉴욕 트럼프타워 앞에서 찢어진 옷을 입은 채로 성조기를 찢고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주여. 도널드 트럼프에게 축복을~. 주여 미국에 축복을~.”
팬티 차림에 카우보이모자를 쓴 백인 중년 남성이 기타를 둘러멘 채 흥겨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듯 구호를 외쳤다. 팬티의 엉덩이 쪽과 기타 정면에는 ‘트럼프’란 글씨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뉴욕 타임스스퀘어의 명물 ‘벌거벗은 카우보이’다. 그는 “미국은 위대하다. 왜냐하면 미국은 위대하니까, 할렐루야” 등을 외쳤다.
같은 시각, 10m가량 옆에서 한 여성이 A4 용지 크기의 종이를 손에 든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종이에는 “가족 가운데 몇명이 트럼프를 찍었어요! 미안해요 아메리카!” 그 사람 옆에서는 젊은이 10여명이 “엿먹어라 인종주의”, “미국의 얼굴에 파시즘이라니”, “당신은 나의 대통령이 아냐” 등의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포덤대 학생인 인디아 드루어츠키는 “트럼프는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동성애혐오자다. 공적인 일을 수행해본 적도 없어 나라를 어떻게 운영해 나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을 느끼게 돼 나왔다”고 말했다.
트럼프 선거 캠프가 차려졌던 뉴욕 맨해튼 트럼프타워 앞은 선거 이튿날인 9일(현지시각)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이 뒤섞여 온종일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 지지자 가운데는 ‘벌거벗은 카우보이’ 외에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흑인들’이라는 팻말을 든 흑인 남성들도 눈에 띄었다. 행인들 일부는 이들과 악수를 하거나 반갑게 인사하고 트럼프타워를 배경으로 웃으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트럼프에 반대하는 한 여성은 성조기에 불을 붙인 뒤 남은 깃발을 찢은 채 들고 서 있었고, 오후 2시께는 상반신을 노출한 여성이 트럼프 반대를 외치며 나타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두 진영 사이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행인들과 시비를 다투는 모습은 종종 연출됐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흑인들’은 한 백인 중년 여성과 ‘트럼프 지지가 뭐가 문제냐’를 두고 한바탕 설전을 벌였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행인들은 반대 시위자들에게 “당신들이 틀렸어”라며 비웃음 섞인 표정을 짓기도 했다.
트럼프는 대선 승리 확정 뒤 트럼프타워에서 불과 수백m 떨어진 곳에서 “저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았든 모든 미국인을 향해서 화해와 협력의 손길을 내밀고자 한다. 여러분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지만, 트럼프 앞마당에서는 갈라진 미국 사회의 반목과 대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날 트럼프 지지자와 반대자들이 옥신각신하던 오후 3시께, 경찰은 트럭과 지게차 등을 동원해 트럼프타워 주변에 콘크리트 방벽을 세우는 보안 강화 작업을 진행했다.
뉴욕/글·사진 이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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