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가 치러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퀴큰론스 아레나에서 대선 후보로 지명된 도널드 트럼프가 후보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클리블랜드/AFP 연합뉴스
“러시아가 만약 내 기자회견을 듣고 있다면, 사라진 이메일 3만 건을 찾길 바란다.”
민주당 전당대회 사흘째인 27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민주당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을 해킹하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상대 후보인 클린턴을 정면으로 겨냥한 발언이었으나, 사실상 범법 행위를 부추기면서도 ‘러시아는 미국 대선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주류 공화당의 입장과도 반대되는 발언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전국위원회(DNC) 지도부의 이메일 해킹과 관련해 “만약 그들(러시아)이 해킹을 했다면, (클린턴의) 이메일 3만3000여건도 갖고 있을 것이다”며 “거기에는 일부 멋진 것들도 있을 것이다. 두고 보자”라고 말했다. 이는 클린턴이 국무장관 재임시절 개인 이메일 계정을 통해 공적인 문서를 주고받았고, 이 중 삭제된 3만3000여건은 사적인 편지라고 주장했던 ‘이메일 스캔들’을 겨냥한 발언이다. 클린턴 후보의 도덕성에 의심을 불러왔던 이 사건에 대해 이달 초 ‘미 연방수사국’(FBI)은 ‘극도로 부주의한 행동’이었다고 지적하면서도, ‘법을 어길 의도는 없었다’며 불기소 권고한 바 있다.
러시아가 민주당전국위원회의 이메일을 해킹한 유력한 배후세력으로 지목되고 있는 민감한 시기에 트럼프의 발언이 나오면서, 해킹 논란이 대선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전날인 26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엔비시>(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무엇이든 가능하다”라고 답해, 러시아의 개입 가능성을 우회적으로 시사한 바 있다.
클린턴 쪽은 즉각 성명을 내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가 외국의 강대국에 상대 후보에 대한 스파이 행위를 적극적으로 독려한 첫 사례”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공화당 주류를 대변하는 폴 라이언 하원의장도 같은 날 대변인을 통한 성명에서 트럼프의 발언에 대한 언급 없이 “러시아는 국제적인 위협이자, 폭력배나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미국 선거에 개입하지 말아야한다”고 밝혔다.
미 언론들도 트럼프의 발언을 두고 일제히 비판을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는 제이슨 차페즈 미 하원의원의 말을 빌려 “트럼프가 진심이었다면 완전히 잘못된 발언이며, 농담이었다고 하더라도 실패한 농담이다”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평범한 선거에서 평범한 후보들이 이런 언급을 했다면 매우 중대하면서도 치명적인 발언이 되었을 텐데, 이번 선거나 후보는 모두 평범하지 않다”며 트럼프의 발언을 우회적으로 비꼬았다.
한편, 트럼프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공화당의 노선과 충돌하는 입장을 다시금 드러내기도 했다. 트럼프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대해서 “두고 봐야 한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는데, 이는 미국이 2년 전 러시아의 크림반도를 합병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경제 제재를 부과했던 것에서 한 발짝 물러선 것이다. 트럼프는 “푸틴을 만난 적도 없고, 러시아에 투자를 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면서도, “(러시아가) 보다 친근한 국가로 자리잡는다면, ‘이슬람국가’(IS)에 함께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황금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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