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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남궁(68) 박사는 어릴 적 집안 어른들한테서 할아버지를 빼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학자풍이고, 말수가 적으며,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고 한다. “너는 할아버지의 길을 따라야 해.”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게 된 것은 그의 나이 마흔이 다 돼서 한국 땅을 처음 밟고부터다. 그는 1980년대 중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방문교수로 한국에 와서 할아버지(남궁혁 선생)에 대한 자료를 읽게 됐다. “대단한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국내 첫 신학박사로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정교수를 지내셨다. 한국 교회사에서 보수와 진보를 중재하고 통합하는 데 큰 구실을 하셨다.”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남궁 박사는 남한과 북한, 미국과 북한을 중재하는 데 큰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할아버지와 ‘조우’한 이후 남궁 박사는 북-미 관계의 중요한 길목마다 빠지지 않는 인물이 됐다. 남북한의 평화 공존을 위해선 미국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고, 때론 공동성명의 초안자로, 때론 두 나라 정부의 뜻을 전하는 메신저로 활동해왔다. 1993년 북-미 공동 코뮈니케 초안을 작성했다.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2000년 페리 보고서, 2006년 미군 유해 반환 협상, 2010년 미국 여기자 석방 등에 관여했다. 그는 1990년 첫 방북 이래 지금까지 50여차례 방북했다. 지난달 중순 뉴저지주 쇼트힐스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박현 워싱턴 특파원 hyun21@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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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70년대 중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동아시아연구소 부소장을 맡았는데 당시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소장이었다. 버클리에서 일본·중국의 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스칼라피노 교수를 통해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첫 방북은 언제였나?
“1989년 아시아소사이어티 사무총장 시절 <시엔엔>(CNN)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북한에 대해 묻길래 일반적인 시각과 다른 얘기를 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 경제가 남한보다 나았고, 국제경제에서도 고립돼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주유엔 북한 대사가 그걸 보고 연락이 왔다. 1990년에 첫 방북을 하게 됐다.”
-북한과 관계 맺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지금까지 활동해온 동기는 무엇인가?
“이것은 ‘생크리스’(thankless)한 일이다.”
-무슨 말인가?
“일이 힘들지만 아무 보상도 없고 생색도 안 나는 일이라는 말이다. 보상보다는 오히려 비난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한국 교회사에서 진보와 보수를 통합하는 데 구실을 했는데, 내가 현재 한반도 문제에서 하려는 역할과 같다. 한반도도 보수와 진보가 다투고 있다. 할아버지가 나를 여기로 인도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는가?
“없다. 나는 상하이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는데 3살 생일 때인 1948년 할아버지가 오셨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상하이에서 계속 자랐나?
“아버지(남궁요섭)가 1949년에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년이 못 돼서 다시 일본으로 이주해서 고등학교까지 거기서 마쳤다.”
-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아버지는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 의대)을 졸업한 의사였는데, 남과 북 모두 나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남북은 서로를 죽이는 민족이라며 ‘호프리스’(hopeless·가망없는)라고 했다. 우리들한테 남북을 모두 잊으라고 했다. 자녀가 미국화되길 바랐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미국 학교를 다녔다. 내가 한반도 문제를 오랫동안 몰랐던 것은 이런 이유가 있다.”
남궁 박사는 쟁쟁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랐다. 독립운동 유공자를 7명이나 배출했다. <황성신문> 설립자인 남궁억 선생이 할아버지의 육촌 형제다. 3·1운동과 2·8독립선언을 주도한 김마리아 선생이 할머니의 여동생이다. 또 1919년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인 김규식 선생과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위원이던 서병호 선생이 할머니의 고모부다. 한국 최초의 양의사로 무관학교에 자금지원을 한 김필순 선생과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대표이던 김순애 선생이 할머니의 삼촌과 고모다. 상하이 한인청년당을 창당한 서재현 선생은 할머니와 사촌 간이다.
-할아버지도 항일운동에 관여했나?
“3·1운동에 참여했다. 김마리아 선생이 일본에서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들어와서 방방곡곡에 뿌렸는데, 이때 할아버지도 이걸 복사해서 뿌리는 데 참여했다. 그래서 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할아버지는 남궁억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남궁억 선생 사회장에서 상주를 맡았다. 할아버지는 1930년대 말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김구 선생이 가까운 친구였는데 상하이 이주를 권했다고 한다.”
-가족사를 복원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힌 것으로 안다.
“그렇다. 많은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이 남과 북 모두에서 잊혀졌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독립과 근대화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냉전이 이들을 지워버렸다. 북한에서도 김마리아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한도 마찬가지다. 나는 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다시 되살리고 싶다.”
최근 한반도 정세로 화제를 돌렸다. 남궁 박사는 정전협정을 맺은 지 60년이 되도록 한반도의 긴장이 풀리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많은 분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을 했는데도 북-미 관계나 남북 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80년대 중반의 냉전 시기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다. 남과 북이 서로를 많이 알게 됐다. 그동안 남한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 젊은이들은 남한 문화를 안다.”
경수로·중국 등 지렛대로
북핵 포기 이끌어낼 수 없어
남북관계 개선을 시작으로
한국 주도하고 미국 참여해야
한 정부만 편들지 않았기에
모든 정부에서 날 신뢰하는 것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에
작으나마 기여한 사람 되고싶다
-북-미 진전이 거의 없다. 오바마 행정부는 대북 제재를 강화하고 북한과 협상할 생각도 없는 것 같다.
“미국은 지금 지쳐 있다. 북한과 협상하려 했으나 실망했다. 그러나 조만간 협상을 재개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미국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해결책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 경수로 지어주고 핵 포기하도록 한다거나 중국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킨다는 사고방식이 그런 거다. 그러나 상황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오바마 2기 행정부 들어서도 ‘전략적 인내’ 정책이 바뀌지 않고 있다. 바뀔 수 있는 어떤 계기가 있을까?
“미국은 한국이 대북 협상을 주도하라고 말한다. 개성공단·금강산·이산가족 등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안보 이슈다. 한국이 안보 이슈를 주도하고 미국이 여기에 참여하면, 미국이 북한에 재관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북한은 안보를 보장받으려고 핵문제는 미국과 협상하려고 해오지 않았나. 핵문제에서도 남한과 먼저 협상할 의지를 갖고 있나?
“북한은 최근 2~3년간 핵 이슈에서 남한과 협상하려는 의지를 보여왔다. 북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안보 이슈는 미국과만 다뤄야 한다는 생각은 과거 얘기다.”
-북-미 대화가 조만간 재개될 가능성은 있는가?
“현재로선 한국이 남북관계를 개선하지 않는 한 미국이 많이 움직일 수 없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미국이 협상에 복귀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지난해 말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 등을 하며 긴장의 수위를 높인 것에 불만이 많은 것 같다. 북한은 왜 그랬나?
“지난해 2·29 합의의 실패 때문이다. 위성 발사가 미사일 발사에 포함되느냐에 대해 북-미가 합의에 실패했다. 미국은 포함된다고 하고 북한은 아니라고 했다. 이후 미국은 빠르게 제재 국면으로 갔다. 북한은 헌법에 핵보유국임을 명기하고, 미국이 먼저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의 실패에 따른 자연스런 악화의 과정이었다.”
-2·29 합의는 누구 말이 맞나?
“양쪽 다 틀렸다. 양쪽이 합의를 못했다. 그래서 상황이 악화된 것이다.”
-북한 주장은 뭔가?
“북한은 2·29 합의를 위해 3차례 협상을 했고 그때마다 위성 발사는 내용에 포함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 거다.”
-미국은 북한이 개혁개방 같은 확실한 변화의 의지를 보여야 관계 개선에 나선다는 태도인 것 같다.
“북한은 변화의 신호를 보여줄 것이다. 예컨대 1년 안에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사용할 거다. 모든 것을 푸는 게 아니라, 특정 웹사이트는 차단하며 점진적으로 할 것이다. 지난 5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 <조선중앙텔레비전>에 태극기가 30분이나 노출됐는데 이것도 변화의 조짐이다. 태극기가 이렇게 노출된 것은 과거에는 없던 일이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경제개혁에 의지가 있나?
“이른바 ‘스텔스 개혁’이다. 덩샤오핑 같은 거대한 개방은 아니다. 점진적으로 할 거다. 북한이 6개의 관광특구를 개발한다고 최근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이 전했는데, 이런 식의 작은 변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할 것이다. 아마도 10년 뒤에는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는 1990년부터 지금까지 북-미, 남북, 북-일 간의 메신저로 활동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는 주로 북-미 정부 간,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선 남북과 북-일 정부 간의 중재에도 관여했다. 그는 스스로 어느 정부에도 소속돼 있지 않다고 했다.
-지금까지 활동해오며 가장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정부가 나를 믿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 한국, 일본, 중국에서도 나를 ‘정직한 브로커’, ‘정직한 사람’으로 여긴다.”
-일부에선 친북 또는 종북으로 여기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둘 다 아니다.”
-북한과는 어떤 관계인가?
“그들이 나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친북은 아니다. 나는 어느 한 정부를 위해서만 일하지 않는다. 나의 동기는 한반도 평화 증진에 작으나마 기여하는 것이다.”
-계획은?
“나이 70이 다 돼 간다. 거의 25년을 이 일에 매진했다. 그게 나의 작은 기여다. 일을 할 수 없을 때까지, 하던 일을 할 것이다. 앞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주도를 해야 한다. 한반도 상황이 개선되면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반도의 평화공존으로 가는 길의 초기 단계에 관여한 사람의 한명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