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부가 25일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비를 찾아 함께 걷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한-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한국이 큰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문제들에 대해 “한국이 결정할 문제”라는 태도를 보이던 미국이 자신들의 요구에 따를 것을 종용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막후 협상에서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이나 ‘대중국 포위망 동참’ 등과 관련해 더 노골적인 요구들을 쏟아냈을 것으로 짐작돼, 회담 뒤 한국이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떠안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25일(현지시각) 브리핑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더 많은 지원을 기대한다는데, 정확히 무엇을 원하냐’는 질문에 러시아한테 침공당한 우크라이나 상황을 한국전쟁(1950~1953)에 비유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전쟁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생각해보라”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단결하는 국제사회의 중요성을 (한국보다) 더 잘 아는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전쟁이 계속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한계가 없다”며 “우리는 한국의 (추가) 지원이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다”고 했다. 또 “다음에는 한국이 무엇을 지원할 것인가에 대해 두 지도자들 간 실질적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전날 브리핑에서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분명 대화의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라고 한 데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이 ‘살상무기’를 적극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를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 당국자들은 유출된 기밀문서로 한국 국가안보실이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한 사실이 알려진 지난 8일 이후 “2억3천만달러(약 3073억원) 규모의 지원에 대해 한국에 감사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또 지원을 계속하거나 무엇을 지원할지는 “한국이 결정할 문제”라고 해왔다.
그러다 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지원 품목까지 논의될 것이라며 ‘진짜 속내’를 노골적으로 내비친 셈이다. ‘살상무기’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았지만, 발언의 흐름을 볼 때 이와 관련된 ‘실질적 논의’가 정상 수준에서 이뤄질 것으로 관측된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23일 ‘중국이 미국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을 제재하면 한국 업체들이 중국의 부족분을 채우지 말라’고 미국이 한국에 요구했다는 보도와 관련된 태도도 비슷하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이튿날인 24일 보도에 대한 질문에 “한국 정부가 결정할 문제”라고 답했다. 베단트 파텔 미 국무부 부대변인도 25일 브리핑에서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 등에 동참할지는 “궁극적으로 한국이 결정할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커비 조정관은 25일 이날 한국 기자에겐 한-미 ‘경제 안보’ 협력은 “반도체와 관련된 투자를 조율하는 것과 경제적 압박에 대해 중요 기술을 지켜내는 노력”을 포함한다고 했다. 역시 ‘한국이 결정할 문제’라는 태도에서 나아가 대중 압박에 적극 동참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결국 미국이 한국의 외교적·경제적 자율성이 걸린 두 사안에 ‘한국이 결정할 문제’라는 태도를 보인 것은 한국의 판단을 존중한다기보다 미국의 요구에 호응할지를 지켜보겠다는 뉘앙스를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의 요구를 받아 안으면 중·러와 마찰이 불가피하고, 거절하면 동맹 관계에 금이 가는 난처한 상황에 내몰린 셈이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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