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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인종주의 상징’ 로버트 리 동상 131년 만에 철거

등록 2021-09-09 10:47수정 2021-09-09 20:32

남부연합 총사령관으로 추앙받아온 인물
미 버지니아 리치먼드 시내 대형 기마상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철거 요구 받아
반인종주의자들 현장서 “잘 가라” 환호
인부들이 8일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시내에 서 있던 로버트 리의 동상에 크레인 줄을 연결해 들어올리고 있다. 리치먼드/로이터 연합뉴스
인부들이 8일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시내에 서 있던 로버트 리의 동상에 크레인 줄을 연결해 들어올리고 있다. 리치먼드/로이터 연합뉴스

131년간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전설적 장군’의 동상이 결국 한 흑인의 죽음 때문에 쓰러졌다.

인종주의 논란의 소재가 돼온 미국 버지니아주 주도 리치먼드의 로버트 리(1807~1870) 동상이 마침내 철거됐다. <에이피>(AP) 통신은 8일 오전(현지시각) 철거를 요구해온 수백명의 환호 속에 리의 동상이 크레인에 묶여 땅으로 내려왔다고 보도했다. 동상은 운반을 위해 두 조각으로 분리됐다. 최종 처리 방식이 결정될 때까지 비공개 장소에 보관된다.

리치먼드 시내의 리 동상은 미국에 남아 있는 남부연합 상징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상징적인 것이었다. 남북전쟁(1861~1865) 때 남부연합 수도였던 리치먼드에 1890년에 설치된 기마상은 12미터 높이 받침대 위에 6.4미터 크기로 위용을 자랑했다. 프랑스의 유명 조각가가 만들어 보낸 12톤짜리 동상을 옮기려고 1만여명이 마차와 밧줄을 이용했다. 동상은 예술적으로도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운반을 위해 허리 부위가 잘린 로버트 리의 동상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다. 리치먼드/AP 연합뉴스
운반을 위해 허리 부위가 잘린 로버트 리의 동상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다. 리치먼드/AP 연합뉴스

남부연합군을 이끈 리의 동상은 남부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의 비운과 ‘잃어버린 대의’를 위로하는 상징이었다. 반대로 흑인들에게는 모욕적인 설치물이었다. 특히 지난해 5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관한테 목이 눌려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라는 운동이 폭발하면서 동상을 치우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반인종주의자들은 철거를 요구하는 낙서로 동상 받침대를 뒤덮었다. 민주당 소속인 랠프 노섬 주지사가 철거를 결정했지만, 반대 소송 탓에 주대법원 결정이 나오기까지 1년여간 실행이 미뤄졌다. 인종주의 문제를 떠나, 역사적·예술적 의미가 있는 동상을 철거하지 말자는 주장도 있었다.

리는 ‘비운의 총사령관’으로 불린다. 그 아버지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했고 버지니아주 주지사를 지냈다. 군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리는 미-멕시코전쟁(1846~1848)에서 공을 세우는 등 매우 촉망받는 군인이었다. 정치에 별 관심이 없고 남북 분리에도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터지자, 리는 고향 버지니아 편을 들 수밖에 없다며 남부연합군에 가담했다. 남부연합군 총사령관까지 올랐으나 패색이 짙어지자 항복하고, 3년 뒤 사면받았다. 지금도 버지니아주에서는 리의 이름을 딴 도시, 대학, 거리, 도로가 그의 유명세를 말해준다.

로버트 리의 동상 철거를 지켜보는 이들이 환호하고 있다. 리치먼드/로이터 연합뉴스
로버트 리의 동상 철거를 지켜보는 이들이 환호하고 있다. 리치먼드/로이터 연합뉴스

노섬 주지사는 철거 현장을 페이스북 등으로 중계했다. <에이피>는 충돌에 대비해 경찰이 설치한 펜스 주변에서 철거를 지켜보던 이들이 “누구의 거리인가? 우리 거리다”라고 소리치며 감격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어이, 잘 가라”라는 고함도 이어졌다. 버지니아주 민주당 흑인 하원의원인 덜로레스 매퀸은 모욕감 때문에 리의 동상이 있던 리치먼드의 ‘기념비 거리’로는 차를 몰고가지 않았다고 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동상 철거에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며 “(이번에는) 리가 빨리 항복했다”고 했다. 노섬 주지사 곁에서 철거를 지켜보던 전 주지사 자문관 리타 데이비스는 “(흑인인) 내 앞에 살았고, 나를 위해 길을 깔아준 이들이 이 장면을 보면 좋겠다. 마침내 신이 승리했다”고 이 신문에 말했다.

버지니아주는 동상 받침대는 치우지 않고, 명판을 떼어낸 뒤 타임캡슐을 넣어둘 방침이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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