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왕’ 전세사기 사건의 피해 세입자들이 2022년 12월27일 세종시 국토교통부 앞에서 피해 상황을 호소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영업자 박아무개(34)씨는 2020년 5월 ‘빌라왕’ 김아무개씨가 소유한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한 빌라에 전세보증금 2억2500만원을 주고 입주했다. 전세대출은 2억원을 받았고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도 들었다. 2022년 5월 계약만료를 앞두고 김씨가 보증금 5%를 올려달라기에 박씨는 거절했다. 그러자 김씨는 계약해지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렇게 알고 이사 준비를 하는 동안 계약기간은 끝났고 김씨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제가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하니 김씨는 신용불량자라서 돌려줄 돈이 없다며 해당 집을 2억5천만원에 사라고 했어요.”
당시 시세보다 높은 가격이고 집을 살 이유도 없어서 박씨는 주택도시보증공사에 반환보증 이행청구를 했다. 공사 쪽은 계약기간이 지나버려 ‘묵시적 계약연장’이 된 경우라며 전세금 반환 사유가 안 된다고 했다. 박씨는 집주인 김씨와의 통화를 녹음하지 않아서 계약해지 의사를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이 와중에 임대인 김씨는 2022년 10월 갑자기 숨졌다. 사망 원인은 뇌출혈로 전해진다.
박씨는 이미 서울에 있는 가게를 부모님이 계시는 인천으로 옮긴 상태인데 전세보증금을 받을 길이 없어 이사하지 못하고 있다. 김씨 사망으로 보증금 반환 절차가 늦어져 언제 돌려받을지도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다. 현재 서울 강북구 집과 인천 가게를 오가는 박씨는 “결혼을 앞뒀는데 이 사건 때문에 결혼 계획도 늦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과 수도권 빌라 1139채를 무자본 갭투기 형태로 소유했다가 세입자들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고 숨진 ‘빌라왕’ 전세사기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전세사기는 객관적인 시세 정보가 부족한 빌라에서 발생하기 쉽다. 건축주와 부동산중개인 등이 짜고 ‘명의만 임대인’을 내세운 뒤, 시세보다 높은 금액으로 세입자와 전세계약을 하고 나서 보증금을 가로채는 수법이 대표적이다.
빌라왕 김씨는 자신이 직접 임대인으로 나서거나 본인이 대표로 있는 ㄷ법인 명의로 임대차계약을 했다. 박씨처럼 전세금 반환을 요구하는 세입자들에게 김씨는 오히려 집을 비싼 값에 사도록 요구하며 버텼다. 피해자는 주로 20·30대 직장인들이다. 경찰은 김씨 배후에 공모세력이 있는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며 관련자 5명을 입건했다.
이번 빌라왕 사건에서는 그동안 ‘안전장치’로 여겨졌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제도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김씨가 소유한 주택 세입자 1139명 가운데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614명(54%)이다. 국토부는 이 가운데 174건은 김씨 사망 전에 주택도시보증공사가 대신 갚아줬거나(대위변제) 현재 대위변제 절차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나머지 440건은 아직 전세계약이 끝나지 않은 사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중에는 박씨처럼 계약해지 의사를 입증하지 못한 경우도 포함됐다.
주택도시보증공사 약관을 보면, 전세계약이 해지 또는 종료된 뒤 한 달 안에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먼저 주택임차권등기를 해야 한다. 세입자가 보증금을 받지 못한 채 이사하더라도 ‘법적으로 보증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등기부등본에 명시하는 절차다. 이 절차를 마쳐야 주택도시보증공사에 반환보증 이행청구를 하고 심사를 거쳐 보증금을 받을 수 있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먼저 갚아주고 임대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
하지만 임대인 김씨가 숨지면서 세입자들은 법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할 대상’이 사라진 상황에 놓였다. 일반적인 경우 상속 절차가 이뤄지면 상속인을 상대로 계약해지를 하면 되지만, 김씨는 종합부동산세 62억원을 체납한 상태라 현재 김씨의 부모는 상속포기를 신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씨의 4촌 범위에서 상속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법원이 상속재산관리인을 지정하고 이후 보증금 반환 절차를 진행한다. 상속포기와 법원의 상속관리인 지정까지만 최소 6개월 이상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사는 박아무개(28)씨는 2022년 12월27일 빌라왕 김씨 피해자들이 연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로 법원 경매가 밀려 있는 상태이고 최근 고금리로 매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경매 진행이 더디다. 경매 절차까지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리는데 상속 절차까지 고려하면 더 늦어진다. 피해자들은 거의 확정적인 손실을 기약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앞서 12월22일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김씨의) 상속인을 확정짓고, 임차권 등기와 반환 등 절차를 최대한 앞당기겠다”고 말했다.
빌라왕 피해자 가운데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525명(46%)은 더 큰 문제다. 경매로 보증금을 건져야 한다. 김씨와 계약한 세입자들의 전세가가 대체로 집값에 육박하거나 더 높고, 경매로 넘어가더라도 시세의 70~80% 수준인 낙찰가율을 고려하면 사실상 전세보증금을 모두 건지기 어렵다. 낙찰되더라도 김씨가 체납한 종합부동산세가 먼저 징수되기 때문에 세입자들이 받는 보증금 액수는 더 줄어든다.
개인 임대인과 계약한 상태에서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했는데 이후 법인으로 임대인 명의가 변경된 경우는 전세보증금 반환을 위한 이행청구조차 불가능하다. 빌라왕 김씨가 대표로 있는 ㄷ법인으로 임대인이 변경된 세입자들은 “세입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임대인이 법인 명의로 바뀐 경우는 이행청구 및 대출연장이 가능하도록 조정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빌라왕 김씨가 불법 증축한 상가를 주택으로 위장해 전세사기를 벌인 사례도 나타났다. 건축주, 김씨, 부동산중개인 등이 공모해 전세대출이 안 되는 ‘근린생활시설’을 ‘주택’으로 서류를 허위로 꾸며 전세대출을 받아내는 식으로 세입자를 모은 것이다. 이런 집에 전세로 들어간 유아무개(30)씨는 “부동산에서 일반 집과 다르지 않고 전세대출이 나오니 걱정하지 말라고, 문제없는 안전한 집이라고 해서 계약했다. 대출이 나오지 않았으면 계약도 안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집은 불법 주택이라 전세대출 연장도 안 된다. 유씨는 “경매에 넘어가면 전세대출을 갚아야 하는데 개인회생이나 파산을 할지도 모른다. 월세라도 아껴보려 전세계약을 했던 사회초년생들이 매일 밤 피눈물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가격 하락기에 집값이 전셋값보다 떨어지는 ‘깡통주택’이 속출하면서 제2, 제3의 빌라왕이 나타나는 등 세입자가 보증금을 떼이는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인천에서 갭투자 등으로 빌라·오피스텔 수십 채를 보유했던 27살 송아무개씨가 2022년 12월12일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실이 최근 알려졌다. 송씨 집의 세입자로 있는 명아무개(32)씨가 2021년 1월 전세계약을 한 뒤 한 달 만에 집주인이 송씨로 바뀌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명씨가 부동산에 문의하니 부동산에서는 “임대인 간 매매계약서에 전세 승계 내용이 있으니 별도로 임대차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명씨는 2022년 7월부터 송씨에게 계약갱신 거절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고 답도 받았다. 하지만 12월 중순 연락이 닿지 않자 부동산에 확인하는 과정에서 송씨의 사망 사실을 알았다.
명씨는 주택도시보증공사에 보증금 반환 이행청구를 했지만, 자신과 연락을 주고받은 송씨의 전화번호와 임대인 간 매매계약서의 송씨 전화번호가 다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2021년 송씨가 매매계약을 한 뒤 전화번호를 바꿨는데 이런 사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명씨는 “전세 만기를 한 달 앞둔 상황에서 상속자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대출기간 안에 해결이 안 되면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 처했다. 정신적·금전적 피해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빌라왕 김씨 전세사기 피해자모임의 대표 배소현씨는 “국토부에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발족한다고 했지만 이후 아무런 연락을 못 받았다. 정부가 피해자 사례를 정확히 듣고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 미팅을 적극적으로 해서 하루빨리 임차인들의 권리가 보호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미가입자들에게는 임시지원책으로 가구당 최대 1억6천만원을 연 1%의 저금리로 대출해주기로 했다. 2023년 1월10일에는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2차 설명회를 열 예정이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