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10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사건 파기환송심 첫 공판에 출석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횡령이나 배임을 저지른 재벌 총수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기업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 연구에서 재벌 총수가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을 때는 주가에 유의미한 변화가 없었지만, 총수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등 법원이 관대한 판결을 내렸을 때 오히려 주가가 더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룹 총수가 실형을 받으면 재벌 그룹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재계의 ‘공포 마케팅’이 틀렸다는 점을 입증한 첫 연구 결과다.
경제개혁연구소는 13일 이런 내용을 담은 ‘재벌총수에 대한 사법처리는 기업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재벌총수에 대한 형사재판 결과를 이용한 분석’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2000년부터 2018년 사이에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총수 11명과 이들이 지배하는 35개 기업집단(재벌 그룹) 및 319개의 계열사를 대상으로 분석했다. 총수에 대한 법원의 판결 시점 앞뒤로 계열사들의 주가 변화를 살펴보는 방식이다.
주가의 변화는 재벌 총수에 대한 법원 판결 직후에 나타나는 개별 기업의 ‘비정상수익률’로 측정했다. 비정상수익률이란 시장 전체의 변화로 예측할 수 있는 수익률(정상 수익률)과 실제 수익률의 차이를 말한다. 그 결과 실형 선고에 대한 평균 누적 비정상수익률은 분석 틀에 따라 -0.6% 또는 -0.01%로 나타났다. 주식 가치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수치다. 반면, 집행유예 선고에 대한 평균 누적 비정상수익률은 -1.4% 또는 -3.0%로 나타나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줬다. ‘실형’보다는 ‘집행유예’에서 주가가 더 떨어진 것이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 결과는 문제가 있는 총수들이 계속해서 경영하게 만드는 구조를 투자자들이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횡령·배임 등 문제를 일으킨 재벌 총수를 투자자들이 ‘위험 요인’으로 판단한 사례는 지난해 한진그룹 사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3월 조양호 당시 한진그룹 회장이 주주총회 표결로 경영권을 상실한 직후 대한항공과 한진 등 한진그룹 계열사의 주가가 급등했다. 당시 조 회장은 27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였다. 비슷한 시기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감사보고서 사태’(감사인인 외부 회계법인이 회사가 작성한 재무상태표에 문제가 있다며 한정의견을 줌)에 책임을 지고 그룹 경영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시아나항공 주가는 급등했다. 이는 재벌 총수가 자신의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저지르는 불법 행태가 오히려 기업 가치를 하락시킬 것이라는 판단을 투자자들이 이미 내리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보고서는 “총수의 배임·횡령 등 사적 이익 추구에 대한 엄정한 형사사법 절차가 총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개별 계열사에 ‘리더십 공백’ 같은 부정적 충격을 가져온다고 보긴 어렵다”며 “오히려 집행유예와 같은 관대한 판결이 시장에 부정적 신호를 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송채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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