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오일뱅크는 현대케미칼 등 5개 자회사로부터 상표권 사용료를 받는다. 이 회사의 시아이(CI·Corporate Identity)는 전국 현대오일뱅크 주유소에 쓰여 인지도가 높다. 자회사들이 현대오일뱅크에 사용료를 지급할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오일뱅크는 앞으로는 인지도가 높은 시아이를 떼버리고 지주사 에이치디(HD)현대(옛 현대중공업그룹)가 만든 새 시아이를 쓰게 된다. 이에 따라 그동안 받아온 사용료는 사라지고, 지주사 에이치디현대에 사용료를 내야 할 처지로 바뀐다. 현대오일뱅크는 회사 수익에 해가 되는 결정을 내려도 괜찮을까.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14일 현대중공업과 현대오일뱅크 등 5개 회사에 시아이 변경을 결정한 이유 등을 질의했다. 에이치디현대는 지난해 12월 사명을 변경하면서 삼각형 두 개를 겹쳐놓은 기존 시아이를 대체할 ‘포워드 마크’라는 이름을 가진 가로 화살표 모양의 새 시아이를 공개했다.
기존 시아이는 에이치디현대를 포함한 6개 회사가 소유하고 있다. 2020년 14개 계열사로부터 시아이 사용료 182억원을 받아 이들 회사가 나눠 가졌다. 새로 만든 시아이를 에이치디현대가 단독 소유하면 나머지 5개 계열사는 상표권 수수료 수익이 사라지고, 새 시아이 사용료를 지불해야 할 처지로 몰린다.
이에 대해 에이치디현대는 신규 시아이는 에이치디현대가 새로 만든 ‘심볼’ 부분(가로 삼각형 모양)과 ‘HD현대’ 상호 부분으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존 시아이 소유 회사들은 상호 부분의 권리를 가진다고 답했다. 다만, 상호 부분 사용료율은 기존 0.2%에서 0.14%로 낮아진다. 심볼 부분 권리는 에이치디현대가 단독 소유하고 0.05%의 사용료를 적용할 계획이다. 5개 회사 권리가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다소 줄어든다는 설명이다.
경제개혁연대는 “5개 회사는 기존 대비 70% 수준의 상표권 사용료 수취만 가능하며(사용료율 0.14%), 신규 시아이를 사용하게 되면서 기존에 부담하지 않았던 심볼 부분에 대한 상표권 사용료(사용료율 0.05%)를 에이치디현대에 지급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매출 규모가 큰 현대중공업은 상표권 사용료로 거둬들이는 금액보다 에이치디현대에 지급할 금액이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자체 브랜드를 사용하는 현대오일뱅크는 더는 사용료를 받지 못하고, 막대한 규모의 상표권 사용료 부담을 떠안게 된다. 사용료는 매출 규모에 비례하는데, 두 회사의 매출 비중은 그룹 전체 매출의 85.9%에 달하기 때문이다. 두 회사는 지주사 시아이로 교체하면서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서울 시내 현대오일뱅크 주유소 모습. 연합뉴스
경제개혁연대는 “주력 계열사들이 자신이 향유해야 할 상표권 사용료 수익을 지주회사에 제공하는 것”이라며 “각 회사가 시아이 변경을 결정한 이유와 이사회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의사결정을 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상표권 사용료를 통해 지주사 수익이 늘어나면 에이치디현대 대주주의 배당수익도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정기선 에이치디현대 사장은 5.3%의 지분을 보유 중인데, 경영권 승계가 진행 중이어서 현금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에이치디현대가 신규 시아이와 관련해 3년간 총 722억원의 비용을 집행할 계획을 세웠다고 밝혔는데, 이 비용은 상표권 사용료 수취액 증가로 5년 내에 모두 회수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시아이 변경만으로 에이치디현대가 얻을 수 있는 기대수익이 지나치게 높아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에이치디현대 쪽은 계열사는 사업에 집중하고 지주사가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데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에이치디현대 관계자는 “새 시아이 도입은 경영권 승계와는 무관하다. 에이치디현대의 사용료 수익을 새 시아이의 브랜드 인지도 향상에 사용하겠다”며 “계열회사와 사전에 충분한 설명회를 거쳐 각 사에서 도입 타당성을 검토한 후 이사회 승인을 받는 등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됐다”고 말했다.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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