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안보란 (에너지 공급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차질 없이 이뤄지는 능력을 의미한다. 물량과 가격 조건이 동시에 충족돼야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아니더라도, 이미 주요 나라의 에너지 전환과 전기화 정책에 따라 자원 무기화는 고조되고 있다.”(박호정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
에너지 수급 상황이 악화하고 가격이 치솟자 ‘안보’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많아지고 있다. 현재 상황을 보면, 유가가 연일 상승해 올해 두바이유 기준 평균 가격이 100달러를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액화천연가스(LNG)는 유럽발 수요 급증 상황이 이어지며, 계절적으로 난방 수요가 감소하며 비수기로 접어드는 3월 들어서도 가격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 액화석유가스(LPG) 가격 역시 최근 10년 사이 최고 수준이다. 도로 위 택시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박호정 교수의 설명대로 에너지 안보의 개념이 ‘합리적인 가격’의 공급을 담고 있다면, 우리나라는 이미 에너지 안보 위기를 겪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일시적인 충격’이라지만, 에너지 가격 상승은 러시아 사태 이전부터 진행 중이었다는 지적도 많다.
이에 친환경보다 안정적인 공급이 우선이란 주장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친환경·재생에너지 전환도 좋지만,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위해서라면 화석연료를 완전히 배제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한 에너지 업체 임원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이와 관련해 “가령 친환경 에너지 전환 과정에 필요한 수소(H₂) 에너지를 생산할 때도 엘엔지가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한다. 신재생에너지를 구축하는 데도 화석연료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완전한 탈화석연료는 아직은 먼 미래의 얘기”라고 지적했다. 다른 업체 관계자는 “수소를 주원료로 하는 연료전지도 엘엔지에 의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화석연료를 배제할 게 아니라 탄소포집저장(CCS) 기술을 이용해 탄소 배출을 줄이는 식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뒤따랐다.
이는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많은 나라들이 탄소 중립보다 에너지 수급 안정성 확보에 초점을 맞추고, 자국 산업 보호에 무게를 두는 쪽으로 속속 에너지 정책을 바꾸고 있다. 에너지 수급에 대한 위기감이 확산하면서 ‘화석연료’ 시대를 다시 여는 모양새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그동안 ‘온실가스 배출 주범’ 오명을 벗자며 석탄 화력발전을 줄이는 등 친환경 정책을 강화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연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부터 흐름이 바뀌었다. 중국의 화력발전 비중은 2013년부터 줄곧 내려가 2020년 70.4%까지 줄었으나, 지난해엔 70.6%로 다시 반등했다. 중국은 연료용 석탄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석탄 생산량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석탄을 통한 전기 생산이 전년 대비 9% 증가했다. 올해 석탄 소비량은 2%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에너지기구는 이 상황이 2024년까지 유지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의 친환경 정책도 에너지 가격 급등에 밀려 후퇴하는 모양새다. 러시아 사태 이후 치솟는 석유류 제품 가격 안정을 위해 전략 비축유를 대량 방출한 데 이어 석유와 가스 시추를 위한 공공부지 임대도 재개했다. 미국은 석유 시추용 공공부지를 빌려놓고 원유를 생산하지 않은 땅에 과태료 부과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에너지 안보 위기감에 에너지 공급 안정화가 우선이라는 논리가 힘을 얻으면서 새로운 신규 석유 시추를 막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낮추겠다던 바이든 대통령의 공약도 뒤집어지는 모습이다.
유럽 여러 나라들은 러시아산 천연가스와 석유 의존도를 줄이는 방안으로 다른 대륙에서 석유·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확보하는데 혈안이 돼 있다. 호주는 여전히 석탄 생산을 주요 먹거리로 꼽고 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에너지정책학)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전 세계가 지금은 친환경 에너지보다 에너지 수급 상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에는 친환경 이슈로 화석연료 시설 증설이 어려웠는데, 러시아 사태로 에너지 공급 쪽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며 “친환경 에너지로는 안정적인 공급이 어려워지자 속도 조절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기후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안 에너지에 대한 고민 없이 화석연료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위험한 발상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크리스티아나 피게레스 전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은 지난 18일(현지시각)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기후 변화 목적을 위해 재생에너지, 청정에너지원에 대한 투자를 가속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곽진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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