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뼈아픈 역사…전자주민증 신중해야
프라이버시의 종말/
지난 2월10일 영국 정부는 전자주민증 기록을 담은 하드디스크 500개와 백업용 테이프 100개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영국은 2009년 유럽연합 국가 중 처음으로 전자주민증 시범사업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새 정부가 들어서며 이를 없애기로 한 데 따른 후속조처다. 지난해 12월엔 전자주민증 폐지 법률안이 영국 의회를 통과했다.
전자주민증을 둘러싼 논란은 국내에서도 진행중이다. 지난 9일 여당과 야당은 정보인권 침해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을 받아온 전자주민증 도입안을 이번 임시국회에서 상임위에 상정하지 않기로 했다. 정보인권단체들은 지문·주민등록번호 등 11가지 정보가 담긴 전자주민증이 가져올 ‘초감시사회’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영국의 전자주민증 폐기는 개인정보 악용에 대한 유럽 나름의 아픈 기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점령지에서 광범위하게 저질러진 유대인 학살은 프라이버시 정보가 악용될 경우 어떠한 참상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최악의 사례다.
나치 치하의 네덜란드 유대인은 다른 어느 나라 유대인보다 가혹한 학살 피해를 입었다. 네덜란드에 살던 유대인 인구의 73%가 학살과 국외 강제추방 피해를 당했는데, 이는 이웃나라인 벨기에(40%)나 프랑스(25%)는 물론 유럽 어떤 나라보다 높은 비율이다.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암스테르담 시내 은신처에서 3년을 숨어 지내면서 남긴 <안네의 일기>는 나치 치하 유대인의 삶을 널리 알린 작품이다. 안네 프랑크가 끝내 밀고자에 의해 발각돼 아우슈비츠에서 16살로 죽음을 맞은 사실로 인해 네덜란드의 ‘치밀한 유대인 색출’에 대해 주변 나라들의 비판도 높았다. 왜 하필 네덜란드에서 어떤 나라보다 철저한 유대인 학살이 저질러졌을까?
옥스퍼드대학 교수 빅토어 마이어쇤베르거는 그의 책 <딜리트>에서 네덜란드의 인구등록부가 학살의 배경이라고 지목한다. 1930년대 네덜란드 정부는 모든 국민에 대해 이름, 생년월일, 주소, 종교를 비롯해 다양한 개인정보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인구등록사업을 시행했다. 정부의 행정을 편리하게 하고 복지 사업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분을 내건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후 네덜란드는 나치 치하의 독일 손에 들어갔다. 나치는 인구등록부를 입수해, 네덜란드 국민 수백만명의 개인정보를 신원 식별용으로 악용했다. 유대인과 집시를 찾아낸 뒤 무자비한 박해와 학살을 저질렀다.
심지어 네덜란드에 일시적으로 머물던 유대계 난민들조차 네덜란드 국적의 유대인보다 낫게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네덜란드 유대계 국민과 달리 시민권이 없는 난민은 인구등록부에 포함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집시에 대한 나치의 박해는 훨씬 더 가혹했다.
1930년대 네덜란드 국민들은 민주국가의 정부를 신뢰하고 개인정보를 제공했지만, 나치의 침공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미래를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국민들을 상대로 한 대규모 정보 집적의 위험성을 말해준다. 현재의 수집 주체가 아무리 안전장치를 갖추고 선의를 갖고 있더라도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구본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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