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씨는 지난해 3월 보이스피싱으로 개인정보를 털려 저축은행과 캐피털업체에 총 4000만원의 빚을 떠안았다. 사기범이 ㄱ씨 명의의 공동인증서를 발급받은 뒤, 비대면 방식으로 신원을 인증해 대출을 받았다. ㄱ씨는 법원에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냈다. 하지만 법원은 금융사가 “필수적 본인확인 조처를 이행했다”는 이유로 지난달 저축은행 한 곳에 대해 원고(ㄱ씨) 패소로 판결했다.
이처럼 법원은 도둑맞은 개인정보로 발생한 대출에 대해 최근까지 ‘명의자가 갚으라’고 판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금융기관이 충분한 확인절차를 뒀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는 명의도용 범죄로 발생한 사회적 비용을 범죄자나 금융기관이 아닌 피해자에게 떠안긴다는 점에서 불합리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오는 11일 2심이 예정된
카카오뱅크(카뱅)의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 등에서 기존 판례가 뒤집힐지 주목된다.
9일 <한겨레> 취재내용을 종합하면, 법원은 명의도용으로 인한 사기 대출 사건의 채무부존재를 판단할 때 금융기관이 공인인증서 등 금융감독 당국이 인정한 확인 수단을 적용했는지를 주된 판단 기준으로 삼아왔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대부업체 등을 상대로 낸 소송의 2018년 3월 대법원 판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대법원은 보이스피싱 사기단에 속아 은행 보안카드 번호 등을 알려준 명의도용 피해자들의 채무(1억1900만원)를 인정했다. 공인인증서로 신원 인증이 됐다면, 명의자 의사에 반해 작성된 대출 신청서라도 금융기관으로선 ‘본인이 썼다’고 믿을 만했다는 요지였다.
이는 곧 2심에 들어가는 카뱅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에서 카뱅 쪽이 편 논리이기도 하다. 이 소송 원고 ㄴ씨는 지난 2019년 전 남편 ㄷ씨에게 개인정보를 도둑맞아 원치 않게 카뱅에 300만원 빚을 졌다. 지난해 5월 1심 판결에서는 ㄴ씨가 승소했지만, 카뱅 항소로 11일 2심 첫 재판이 열린다.
<한겨레>가 입수한 카뱅의 항소이유서를 보면, 카뱅은 ㄴ씨 이름으로 이뤄진 대출이 유효하다는 근거로 계약 전 “본인확인 절차가 충분히 이뤄졌다”는 점을 든다.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자 환급에 대한 특별법’(전기통신금융사기 특별법)에 따라 휴대전화 본인인증 등 금융사기 방지를 위한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전자문서 및 전자거래 기본법(전자문서법)에 비춰봐도, 금융사 입장에선 이런 절차를 거친 대출이 명의자의 의사로 이뤄졌다고 볼 근거가 충분했다고 카뱅은 주장한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현행 전자문서법이 명의도용 범죄로 체결된 계약의 효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반론이 거세다. 전자문서법 제7조 제2항 제2호는 “수신된 전자문서가 작성자(명의자)와의 ‘관계’에 의해 송신된 경우” 그 문서를 작성자의 의사표시로 볼 수 있다고 규정한다. 명의자가 아닌 사람이 전자 계약서를 보냈다면, 대리권 수여 등으로 둘 사이의 정당한 관계가 입증돼야 같은 효력이 발생한다. 명의도용 범죄자와 피해자 사이에선 이런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게 ㄴ씨 쪽 주장이다.
ㄴ씨를 대리하는 김남희 변호사(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임상교수)는 “명의를 훔친 전 남편 ㄷ씨는 ㄴ씨와 어떠한 적법하고 정당한 관계도 없는 범죄자일 뿐”이라며 “전자문서법의 조문은 범죄자의 권한없는 행위를 범죄 피해자에게 귀속시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금융사가 어떤 절차를 취했는지와 무관하게, 현행법상 범죄 피해자인 명의자의 채무가 인정될 수 없다는 해석도 나온다. 범죄자 등 무권리자 행위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민법 원칙이기 때문이다.
1심 재판부의 판단 역시 비슷했다. 카뱅은 명의자 본인이 대출을 신청했다고 볼만한 ‘정당한 이유’로, 전기통신금융사기 특별법 등이 인정한 신원확인 절차를 거쳤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전기통신금융사기 특별법 등이 대출계약 효력 따지는 잣대가 될 수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본인 확인 절차들을 중복 적용했다는 것만으로는 전자문서법상 (계약이 ㄱ씨의 의사라고 믿을) 정당한 이유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런 요지가 상급심에서도 유지된다면, 명의도용·보이스피싱 피해자 등이 억울한 채무에서 벗어날 길이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김기창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간 주를 이뤄온 법원 판결은 범죄로 발생한 비용을 피해자에게 떠안겨 금융기관의 고객 보호 의지를 약화시켜왔다”며 “법원이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판결을 반복하지 않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카뱅은 지난 8일 <한겨레> 보도로 이 소송이 알려진 뒤 “소비자 보호·구제에 더욱 구체적인 기준과 절차를 두겠다”고 밝혔다. 이어 “(결혼이주여성으로 금융취약계층인) 원고의 사회적 지위와 공평 타당의 관점 등을 고려해 항소심 과정에서 피해자의 부담이 없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천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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