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산은 본사에서 온라인 언론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 산은 제공
“회사채·CP 매입기구에 한국은행이 참여해주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지난달 24일 온라인 언론브리핑에서 한은에 이렇게 감사를 표시했다. 이틀 전인 22일 정부가 특별목적기구(SPV)를 설립해 저신용등급을 포함한 회사채·CP(기업어음) 20조원어치 매입 계획을 발표하면서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정책금융기관이 참여하고 한은이 유동성을 지원한다’고 밝힌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정부 조치에 ‘금융안정’을 정책목표 중 하나로 갖는 중앙은행이 참여한 것에 대해 국책은행 회장이 감사를 표시한 것이 다소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지난 몇십년간 위기 때마다 산은이 사실상 금융시장 안전판 구실을 해온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이 회장은 이보다 한달 전인 3월20일에는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한은의 정책을 두고 “한은이 아직 문제의식이 안일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당시 서운함을 느꼈을 한은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제1차관도 지난달 22일 페이스북을 통해 회사채·CP 매입기구에 한은이 참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김 차관은 “정부가 출자하고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하는 구조로 구체화될 예정”이라며 “훗날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정부와 중앙은행 협업모델의 새로운 이정표로 평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이 페북에 올린 글.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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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부 차관과 국책은행 회장이 언급한 것에서 보듯이, 이번 대책은 그간의 금융위기 대응책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지금까지는 정부는 정부대로, 한은은 한은대로 정책을 펴기 일쑤였다. 경제총괄 부처인 기재부와 금융안정 책임을 맡는 금융위원회는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산은이나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을 동원해 안정 조치에 나섰다. 물가안정과 함께 금융안정을 정책목표로 갖고 있는 한은도 기준금리 조정과 유동성 공급을 통해 금융시장 안정에 나섰지만, 특정 기업이나 업종이 관련되면 국책은행을 통해 간접적으로 금융지원을 하는 데 그쳤다.
이런 행태는 거의 반세기 동안 이어져온 경제부처와 중앙은행 간의 뿌리깊은 불신에 기인한다는 게 금융권 관계자들의 얘기다. 이는 재무부 장관이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으면서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로 지위가 격하된 상태가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면서 잉태됐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은이 독립했지만, 지금까지도 피해의식과 견제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익명을 요청한 금융권 관계자는 “미국에선 재무부 장관과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이 일주일에 한차례씩 만나 현안을 협의하는 게 관례가 돼 있지만, 한국에선 기재부 장관과 한은 총재가 만나면 그게 뉴스가 될 정도로 두 기관은 소원한 관계”라고 말했다.
이번 회사채·CP 매입기구 설립도 큰 원칙만 합의된 상태다. 정부와 한은은 설립 방침을 밝힌 지 열흘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운영방안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청한 당국자는 “매입 대상과 예상재원 조달방안을 두고 논의가 진행중”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당국자는 각 기관이 손실 분담을 얼마만큼 할 것인지가 핵심이라고 전했다. 만약 지원한 기업이 부도가 났을 경우 손실을 입게 되는데 서로 손실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다. 한은은 정부가 재정 보증을 더 많이 해달라고 요구하는 반면에, 정부는 이를 최소화 하려는 입장이다. 미국의 경우 연준은 재무부의 재정 보증 10%를 토대로 수조원 규모의 긴급대출기구를 만든 것을 감안하면, 이런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알 수 있다. 물론 한은이 90% 손실 분담을 한다고 실제 손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실제 손실율이 높지 않기 때문에 정부 보증 재원에서 손실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기존 채권시장안정펀드도 오히려 수익을 낸 바 있다.
한은이 유동성을 어떤 방식으로 제공하고, 어느 기관이 특별목적기구 운영 책임을 맡을 것이냐도 관심사다. 한은에서는 특별목적기구에 직접 자금을 대출하지 않고 산은에 대출하는 간접적인 지원 방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은이 정부와 한은 자금을 받아 특별목적기구 운영 책임을 맡게 되는 구조다. 이렇게 되면, 특별목적기구에서 손실이 나더라도 한은은 손해 볼 일이 없게 된다. 산은한테서 대출금을 회수하면 되기 때문이다. 한은이 산은 뒤에 숨으려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차현진 한은 인재개발원 교수는 “한은법은 영리기업에 여신을 할 때는 해당 기업의 업무와 재산상황을 조사·확인토록 하고 있다”며 “중앙은행이 할 일을 산은에 떠넘기는 것으로 명백히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은에 자금 대주고서 알아서 하라고 하는 건 위선”이라며 “금통위 의장이 재무장관이었던 때의 이런 구시대적 방법은 이젠 졸업할 때가 되었다. 이번에도 그런 방법을 쓴다면 굉장히 실망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시장 안정 책임은 정부와 중앙은행에 있는데, 이를 국책은행이 대신하게 하는 것은 또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산은은 부실기업 구조조정에 금융시장 안전판 역할까지 떠맡는데 자원을 쏟아붓느라 정작 자신의 주임무인 미래 성장기반 마련과 산업경쟁력 강화 등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기재부·한은·금융위의 역할분담과 협력방안을 분명히 한 시나리오별 비상대응 계획을 하루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의 경우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재무부와 연준이 협의해 각종 긴급대출기구를 만들었고, 이번 위기를 맞아 이를 거의 그대로 활용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대응책을 어떻게 만들지를 놓고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앞으로 수출에서 충격이 올텐데 신용도가 좋지 않은 기업은 위험할 수 있다”며 “위기가 발생하면 정부와 중앙은행이 어떻게 자금을 공급하고, 신용물 등급은 어디까지 사줄지 등을 매뉴얼화 해놔야 한다. 그래야 시장이 안심을 한다”고 말했다.
박현 기자
hy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