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금융위원회는 금융소비자 보호를 내실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금융소비자보호 기본법(금소법) 제정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1분기(1~3월) 안에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는 시간표까지 제시했다. 이는 정부가 “불완전판매, 과잉대출 등 금융소비자 피해 발생 예방을 위해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소비자 보호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내놓은 새로운 정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지난해 6월 금융위는 금소법과 관련해 “6월 중 입법예고를 거쳐 하반기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 계획이 지난해 하반기에서 올 1분기로 늦춰진 셈이다. 당시 임종룡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아직까지 국민 체감도 측면에서나 글로벌스탠다드 관점에서는 금융소비자 보호가 상당히 미흡한 수준”이라며 “정부는 20대 국회 개원을 계기로 금소법 제정 노력을 배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정부의 말과 달리 실제 금소법 제정은 더디기만 하다. 정부의 금소법 제정 첫 시도는 18대(2008~2012년) 국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융위는 2012년 2월 금소법을 국회에 제출한다. 19대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정부 제출안은 시간에 쫓겨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은 채 석달 뒤인 5월말 18대 임기만료로 폐기된다.
정부는 19대 국회가 꾸려진 지 두 달 만인 그해 7월에 금소법을 다시 제출했다. 정부 발의를 시작으로 19대엔 금소법 발의가 봇물이 터지듯 했다. 6건의 의원 발의가 잇따랐다.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모두 폐기됐고, 2016년 총선으로 들어선 20대 국회에선 아직 정부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 박주영 금융위 금융소비자과장은 25일 <한겨레>에 “법 제정이 시급하다. 법제처 심사가 끝나는 대로 2월 중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현재 20대 국회에선 금소법 제정안이 두 야당 의원의 발의로 2건 올라와 있는 상태다.
지난 6년여, 국회 3대에 걸쳐 금소법은 발의와 폐기를 반복하고 있다. 필요성엔 여·야·정 이견이 전혀 없다. 환헤지 파생금융 상품인 키코, 저축은행·동양그룹 후순위채 등의 불완전판매로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면서 금융소비자 보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 더 넓게 보면 금소법 제정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적으로 나타난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 움직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영국과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 주요 선진국은 금융소비자보호 법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금소법 제정이 왜 제자리걸음만 하는 걸까?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독립적 금소원 설립을 약속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금소법이 19대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것은 금융감독체계 개편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둘러싼 정부와 정치권 쪽 시각차는 극명했다. 둘 다 금융감독원에서 금융소비자보호처를 떼어내 ‘독립적인’ 금소원을 설립하자는 데는 동의했다. 하지만 어디에 어떻게 둘지를 놓고서 의견이 갈렸다. 야당은 금감원을 쪼개는 김에 금융위도 쪼개 감독체계 전반을 개편하자고 요구했고, 정부는 금융위 중심 감독체계를 유지하자고 맞섰다. 학계와 시민사회단체는 대체로 야당 편이었다. 이런 시각차는 논의의 폭을 좁히기 어렵게 했다. 박용진 의원 쪽은 <한겨레>에 “금소법이 소비자보호에 관한 것만 규정하면 어렵지 않은데, 금융감독체계와 연계돼 있어 늦어지고 있다”며 “매번 금융감독체계 개편 이슈만 논의되다가 끝나 버렸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지난해 두 야당 의원이 발의한 금소법엔 큰 틀의 금융감독체계 개편이 없다. 금소법 제정에 논의를 집중하자는 전략이다. 박용진 의원은 아예 금소원 설립안을 뺐고, 박선숙 의원은 금소원을 설립하되 금융위 산하에 두도록 했다.
지난해 입법예고한 정부안도 감독체계 개편은 빠져 있다. 과거와 달리 정부는 금소원 별도 설립 없이 금감원 안 금융소비자보호처가 그 기능을 대신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밖에도 금소법 통과에 걸림돌이 적잖다. 현재 두 의원이 발의한 금소법엔 소비자 피해에 대한 집단소송제와 징벌적손해배상제가 포함돼 있지만, 지난해 입법예고한 정부안엔 빠져 있다. 박주영 과장은 “정부도 논의는 했지만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징벌적손해배상제도는 징벌적 과징금을 도입해 유사한 효과를 노릴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부가 말하는 징벌적 과징금이란 판매행위 규제를 위반했을 때 그로 인한 수입의 50%까지 과징금을 매기는 것이다. 이는 많게는 손해액의 3배 안에서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야당 쪽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가 다시 금소법 제정안 제출 시간표를 제시했지만 여전히 야당과 시각차가 적지 않은 데다 정치적 격변기가 겹친 탓에 몇 달 안에 열매를 맺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헌재가 대통령 탄핵안을 받아들일 경우, 60일 이내 대선이 치러진다. 그러면 금소법은 대선 후보들의 금융감독체계 개편 공약과 맞물려 논의가 진행되다가 새 정부 출범 뒤에야 급류를 탈 가능성이 있다.
류이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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