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의 한 환전소 앞으로 행인들이 지나가고 있다. 영국 파운드화 가치는 이날 한때 달러당 1.0349파운드까지 떨어졌다. 1971년 이후 최저치다. 연합뉴스
‘악수(나쁜 수), 자충수(자신에게 불리한 행동), 사상누각(모래 위에 지은 집)….’
영국 정부의 대규모 감세정책 발표 직후, 한국 증권사들이 쏟아낸 분석보고서의 제목들이다. 고물가·고금리 시기의 대대적인 감세가 영국 채권과 통화의 ‘쌍끌이 약세’를 이끌며 세계 금융시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고물가 위험을 경고해온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영국은 오랫동안 주요국 중 최악의 거시 경제정책을 추구한 것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국과 ‘닮은꼴 감세’를 추진하는 한국 정부도 정책 수정을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채권시장에서 영국의 만기 2년짜리 국채금리는 전 거래일에 견줘 0.62%포인트 오른 4.53%에 마감했다. 중앙은행의 정책금리 변화에 민감한 이 2년물 국채금리는 지난달 말 약 3%에서 한 달여 만에 50% 넘게 뛰었다. 이른바 ‘길트 탠트럼’(영국 국채 발작)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이는 영국 정부가 지난 23일 발표한 경기 부양책 여파다. 이 부양책은 50년 만에 최대 규모인 연간 450억파운드(약 70조원) 감세에 더해, 가계와 기업에 향후 6개월간 전기·가스요금 등 600억파운드(약 92조원)를 지원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달 초 취임한 리즈 트러스 총리가 물가부담을 낮추고 내년 0%로 예상되는 실질 경제성장률을 2.5%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문제는 부족한 세수를 충당하려면 대규모 국채 발행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채권 공급 확대 우려는 물론 달러화 강세 상황에서 영국 국채 투자수익률이 부진할 거라는 우려가 겹치면서 시장에서 영국 국채 투매 현상이 벌어지고, 국채금리가 튀어 오른 배경이다. 게다가 감세 등 부양책을 통해 시장 수요를 늘리면 물가를 오히려 자극해 정책금리 인상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시장에선 영국 국채가격과 함께 파운드화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동반 폭락한 건 이번 영국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금융시장의 신뢰가 추락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통상 정책금리가 오르면 이자를 더 받으려는 수요가 증가해 통화가치가 올라야 하지만,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감세정책으로 물가안정과 성장 모두 달성하지 못하고 고금리 탓에 정부 빚만 불어나 국가신용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올리비에 블랑샤르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영국이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에 있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유로 위기에 직면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영국 정부가 추진하는 감세는 한국 정부와 판박이다. 집권 초 고물가 시기에 대규모 감세안을 내놓고, 기업 세금 감면과 규제 완화로 공급을 늘리겠다는 논리도 똑같다. 영국과 한국 모두 법인세·소득세·부동산세 인하 등으로 ‘부자 감세’, ‘낙수 효과’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파이낸셜타임즈> 칼럼을 통해 “공급 측면의 (개혁) 약속은 환상이지만, 재정과 경제에 미칠 위험은 그렇지 않다”고 꼬집었다. 감세의 공급 확대 효과가 불투명하고, 고물가 시기에 거시 경제의 불안정만 초래할 현실적 위험은 크다는 얘기다.
영국과 한국의 차이점도 물론 있다. 영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2020년 기준 102.6%로 한국(48.9%)의 2배가 넘는다. 탄탄한 수출 제조업을 버팀목 삼아 경상수지(국가의 전체 저축-투자) 흑자를 지키는 한국과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를 겪으며 에너지 위기에 취약한 영국 사정은 다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최근 대외 이슈의 영향이 워낙 커지며 과거보다 개별 국가들의 정책에 시장이 민감하게 움직이는 편”이라며 “영국은 감세와 지출 확대로 엄청난 재정 적자를 내며 대규모 국채를 발행하게 됐지만, 우리는 코로나19 시기 대비 지출을 줄여 재정 수지(수입-지출)가 개선되는 만큼 기본적인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박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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