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해 수도권에 병원을 연 40대 의사 김아무개씨는 올해 초 세무사의 권유로 ‘새 직원’을 찾아봤다. 김씨는 “지난해 새 차와 백화점상품권 등을 구입하는 데 경비를 써 세금을 줄일 수 있었는데, 올해는 경비 지출에도 한계가 있어 세무사가 가상의 직원을 구하라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세금을 덜 낼 용도로 ‘서류상의 직원’이란 편법을 권한 것이다. 김씨가 지난해 벌어들인 돈은 5억원을 넘었다. 하지만 최고세율 42% 적용 대상인 그에게 적용된 세율은 38%. 각종 경비 지출을 내세운 덕에 과세표준구간이 8800만~1억5000만원에 머물러서다.
#2. 기초생활수급자인 윤아무개(44)씨는 생계급여와 주거급여로 월 78만원을 받는다. ‘조건부 수급자’인 그는 국민취업지원제도에 참여해 이달부터 요양보호사 자격증 학원에 다닐 예정이다. “두드릴 수 있는 건 다 두드려봤다”는 윤씨의 취업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10년 전에도 자활근로로 보일러기능사 교육을 받았지만, 시험 한번 떨어진 뒤엔 ‘중복 지원’이라며 기회를 잃었다. 윤씨는 “정부는 복지 시늉만 하면서 ‘일자리는 알아서 구하라'고 한다. 코로나19까지 터져서 일하고 싶어도 못 하는 수급자가 많다”고 말했다.
깊게 파인 우리 사회 불평등의 골을 메우기 위해 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튼튼한 재정을 뒷받침할 세원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다. 이런 가운데 계층 간 격차, 특히 자산 격차는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 자산의 속성상 자산 보유자에겐 자산 보유에 따른 소득을 챙길 권리가 응당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자산 격차가 자산소득 격차를 낳고, 결국 계층 간 불평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강고한 연쇄고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대표적인 불평등 완화 수단인 현행 세제는 외려 자산가와 고소득 계층에 더 유리하도록 짜여 있다. 사실상 조세 누진성이 크게 훼손된 셈이다.
2일 더불어민주당 양경숙 의원이 국세청으로부터 받은 ‘2012~2019년 통합소득 1000분위 자료’를 보면, 자산 소득의 상위계층 집중도는 매우 높은 상태다. 통합소득이란 근로소득 연말정산 신고자의 소득(근로소득)에 이자·배당·부동산임대 등 종합소득세 신고자의 소득(종합소득)을 더한 뒤 일부 겹치는 부분을 빼고 정리한 소득을 말한다. 대표적인 금융자산 소득인 이자소득과 배당소득만 놓고 봤을 때 이런 현상은 뚜렷하다. 이자소득의 경우, 2016~2019년 4년 동안 상위 1%가 전체 이자소득의 45%가량을 챙겼다. 상위 10%로 대상을 넓히면 전체 이자소득 대비 비율은 90%를 넘어섰다.
배당소득의 집중도는 이보다 조금 더 높다. 주식시장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상위 10%가 전체 배당소득의 93~94%가량을 쓸어갔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기간 상위 1%의 집중도도 69~75% 사이를 오갔다. 이 기간 배당소득 증가율은 56.7%로, 통합소득 증가율(21.08%)을 크게 앞질렀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일해서 버는 소득보다 불로소득 증가율이 더 높아졌다”며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는 물론 투자 유치 명목의 무분별한 비과세 금융 상품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높은 자산소득을 거두는 계층일수록 실질적 세금 부담과 법정 명목세율의 괴리가 크다는 점이다. 현행 자산 관련 세제가 불평등 완충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2012~2019년 통합소득 1000분위 자료를 보면, 최근 4년(2016~2019) 사이 전체 실효세율은 6.97%에서 7.56%로 0.59%포인트 높아졌다. 상위 0.1~1%(0.65%포인트), 상위 1~10%(0.77%포인트)의 실효세율도 조금 높아졌다. 눈에 띄는 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우리나라 최상위계층의 실효세율은 외려 낮아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상위 0.1%는 2018년엔 통합소득 34조2023억원을 벌어 세금으로 11조5330억원을 냈다. 실효세율은 33.72%였다. 이듬해인 2019년엔 36조6239억원을 벌어 12조3213억원의 세금을 내 실효세율(33.64%)이 0.08%포인트 떨어졌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부터 3억~5억원 과세표준 구간을 신설해 3억~5억원에는 40%, 5억원 이상에는 42%로 세율을 인상한 바 있다. 이런데도 정작 최상위계층의 세 부담은 외려 낮아진 셈이다. 최상위계층의 실효세율이 하락한 건 국세청이 1000분위 자료를 공개하기 시작한 2012년 이후 처음이다.
전체 실효세율이 소폭 늘어난 가운데 최상위계층의 실효세율만 낮아진 건, 실질적 세 부담이 최상위계층에서 아래 계층으로 옮겨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병유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개별 데이터를 확인할 수 없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고소득자에게 유리한 각종 세금 공제 혜택 탓에 최상위계층의 실효세율이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물론 문재인 정부 들어 기초연금과 아동수당 등 복지 지출 확대가 불평등 확대 속도를 다소 늦춘 건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전인 2016년 시장소득 지니계수와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각각 0.402와 0.357이었다. 세금을 통한 재분배 정책으로 불평등 정도가 0.045포인트 낮아졌음을 알 수 있다. 2019년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0.404로 늘어난 반면,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0.339로 낮아졌다. 두 지수의 거리가 더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다른 나라에 견주면 가처분소득 지니계수 하락 폭이 낮은 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2018년 기준으로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의 지니계수 차이는 독일 0.211포인트, 미국 0.115포인트로 한국(0.057포인트)보다 훨씬 크다. 그만큼 재분배 효과가 컸다는 얘기다. 홍민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시장소득 불평등을 줄이려면 최저임금 인상이나 최고소득 억제 등 수단이 적고 방법도 어렵다”며 “가처분소득 불평등은 세금 정책과 공적이전소득 등으로 할 수 있어 수단도 많고 효과도 크다”고 말했다.
이처럼 피부로 느끼는 불평등 완화 효과가 미약한 데는 형평성 제고와 누진성 강화라는 조세정의 원칙이 사실상 뒷걸음치는 현실이 있다. 현 정부 들어 진통 속에 탄생한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산하 재정개혁특별위원회가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을 2000만원에서 1000만원으로 낮추는 권고안을 만들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또 지난해 기획재정부가 2023년부터 주식양도차익 과세 기준을 2000만원 이상으로 정했다가 정치권 반발에 5000만원으로 슬그머니 후퇴하기도 했다. 종목당 양도차익에 과세하는 ‘대주주’ 기준을 올해부터 3억원 이상으로 변경하려던 계획도 여야 모두로부터 공격받으며 현행 방식(10억원 이상)을 유지했다. 이와 달리 한국판 뉴딜에 투자하는 뉴딜인프라펀드에 돈을 넣거나 개인용 국고채를 매입해 만기까지 보유하면 분리과세 혜택을 주는 등 고소득자의 세금 혜택 방법은 대폭 확대됐다.
전문가들은 날로 커가는 자산(소득) 불평등의 골을 메우려면 누진성 강화를 통한 조세정의 확보가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박창균 중앙대 교수(경제학)는 “근로소득 불평등보다 자산소득 불평등이 장기적으로 소득 불평등을 낳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며 “저소득층 자산 형성을 도와주는 정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증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도 <불평등의 대가>에서 “경제 회복을 위해서는 부유층 세금을 증대하고, 교육과 직업훈련, 환경친화적 기술, 연구개발 등에 더 과감한 정부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국제통화기금(IMF)이 펴낸 계간지 <금융과 개발> 기고문에서 “코로나19 시대는 물론 향후에도 불평등이 더욱 악화할 수 있다”며 “조세제도 개혁 등 새 시대에 걸맞은 경제 규칙을 다시 쓸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정훈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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