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선산에 마련된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장지에서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왼쪽부터),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이 장지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례 절차가 28일 마무리됨에 따라, 이제부턴 오롯이 ‘이재용의 시간’이 시작됐다. 특히 2014년 5월 이 회장이 쓰러진 뒤 실질적으로 그룹 경영을 진두지휘해온 지난 6년의 시간을 어떻게 발전적으로 넘어서느냐가 이 부회장 앞에 놓인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아들의 운명은 45살의 나이에 똑같이 극적으로 변했다. 1987년 이병철 선대 회장의 뒤를 이어 45살에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이건희 회장은 한동안 전면에 나서기를 극도로 꺼렸다. 선대 회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회장직을 이어받은 터라 친정체제 구축 등 경영권 안정이 필수과제였다. 특히 선대 회장을 대리해 오랜 기간 2인자 역할을 해온 소병해 전 비서실장 등 아버지 가신그룹과의 ‘내부 투쟁’은 불가피했다. 6년 뒤인 1993년 나온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은 인적 청산과 ‘홀로서기’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공식선언이었다. 이 회장은 이를 계기로 그룹의 핵심 경영진 200여명과 함께 68일간 유럽과 일본의 산업 현장을 돌아보며 ‘글로벌 삼성’의 잉태기를 준비했다.
‘이재용의 6년’은 사뭇 달랐다.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증으로 갑자기 쓰러진 뒤, 이 부회장은 45살 이후 실질적으로 그룹을 이끌며 주요 의사결정 전면에 나서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8년 5월 대기업집단 삼성의 동일인(총수)을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으로 변경하며 그룹의 실질적 리더라는 법적 지위를 인정했다. 이건희 시대를 상징하던 이학수 전 부회장과 그의 인맥은 이미 10여년 전 정리된 터라, 아버지 때와 같은 ‘내부 투쟁’이 사실상 불필요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2014년 석유화학·방산 등 비주력 계열사들을 한화와 롯데그룹에 매각하고, 2016년 국내 인수합병 최대 규모인 80억달러에 자동차 전장업체인 하만을 인수한 것도 지난 6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비록 공식 ‘회장’ 자리에 오르진 않았으나, 이건희 회장의 초기 6년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행보다.
하지만 ‘이재용의 6년’이 다른 이유는 정작 따로 있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의 피고인으로 4년째 재판을 받고 있으며, 특히 2017년 2월부터 약 1년의 시간을 구속수감 상태로 보내야 했다. 편법·불법 승계 작업에 스스로 발목을 잡혀서다. 실질적으로 그룹 경영을 진두지휘했음에도,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로서의 그룹 이미지를 글로벌 무대에서 아직 확고하게 뿌리내리지 못한 것도 뼈아픈 대목이다. 1992년, 은둔의 경영자가 세계 최초로 64Mb D램 개발을 이끌어 훗날 반도체 신화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과도 대비된다.
지난 5월 이 부회장은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된 서울고법 형사재판부(정준영 부장판사)의 요구로 설립된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대국민 사과 회견을 했다. 이 부회장은 무노조 경영 폐기와 4세 승계 포기, 시민사회와의 소통 확대, 준법경영을 다짐했다. 이 부회장의 지난 6년은 확연하게 달라진 시대의 눈높이에 부응하지 못한 채 과거의 관행에 얽매인 시간으로 주로 채워졌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는 지난 26일 “삼성이 초일류 글로벌 기업으로 더 높이 비상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건희 회장이 남긴 뜻”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삼성의 바람직한 준법문화 정착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는 이건희 회장이 남긴 과제”라고 논평했다. 지난 6년과는 다른, 새로운 ‘이재용의 시간’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야 할지를 일러준다.
구본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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