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경기도지사(왼쪽)와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2020년 7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회 기본소득 연구포럼 창립총회 및 세미나'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학계와 정치권 일부에서 제기해온 기본소득 의제가 현실 정치에 ‘착근’했다. 그 과정은 이 의제를 그동안 줄기차게 주창해온 쪽도 다소 놀랄 만큼 꽤 극적이며 뜻밖의 급진전이다. 더구나 이 일을 현실화한 주인공이 보수정당인 국민의 힘(옛 미래통합당) 쪽이란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 의제가 지닌 속성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치권에 기본소득이란 씨앗을 뿌린 이는 이재명 경기도 지사이지만, 뿌리를 내리도록 한 이는 뜻밖에도 국민의 힘을 이끄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라고 할 수 있다. 헌정 사상 최초로 비례대표 국회의원만 다섯 차례 역임한 노회한 이 정치인은 특유의 ‘감각’으로 2020년 6월 기본소득 의제를 일순간 현실 정치의 주요 의제로 공론화하는 ‘내공’을 선보였다. 곧바로 정치권과 정책 생태계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기본소득은 마침내 한국 보수정당의 새 정강·정책 ‘1호’로 등극했다.
거대 보수정당 1호 정책
“국가는 국민 개인이 기본소득을 통해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다.”
2020년 8월13일 미래통합당 정강정책개정특별위원회에서 발표한 문제적 문구다. 특위는 당의 새 정강 정책 초안인 ‘10대 약속’(기본 정책)의 33개 하위 항목 중 첫 번째로 기본소득을 제시했다. 이번 움직임이 비록 국정농단의 수구정당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정치적 노림수라고 해도, 정책 생태계와 복지정치 등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기본소득의 성격과 위상이 달라졌다. 기본소득은 이제 학계 담론이나 시민사회 일부의 운동적 의제 틀에서 벗어났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정치 의제란 특정 그물망에서도 나왔으며 기본소득당 등 소수정당의 ‘마이너 의제’도 아니다. 정책 생태계의 궤도 안으로 성큼 진입했다. 한국 현실 정치의 ‘핵심 의제’이자 2022년 대선에서 ‘대표 쟁점 의제’가 될 여지 또한 다분하다. 한국 복지정치에서 또 하나의 역동적인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기본소득을 일찍이 정치 의제로 삼은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기초연금 데자뷔”와 정책 주도권을 운운하며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은 이런 성격 변화의 일단이 잘 나타난다. 이 지사는 “일시적 기본소득(재난지원금)의 놀라운 경제회복 효과가 증명됐음에도 정부와 민주당이 머뭇거리는 사이,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경제교사’였던 김종인 위원장이 기본소득을 치고 나왔고, 어느새 미래통합당의 어젠다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지사는 10년 전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승리 요인 중 하나가 기초연금이었는데, 당시에도 민주당이 비난을 의식해 머뭇거리는 사이, 박 후보에게 선수를 뺏겼다며 그때의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음을 우려했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의 초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론이나 추상적인 층위를 넘어, 이제는 현실 적용 가능한 구체적인 정책 차원으로 급속히 ‘하방’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여러 변종이 출현할 것이다. 재원 문제로 다양한 방식의 정책을 설계할 수밖에 없으며, 태생적 한계를 메우기 위해 기존 사회보장제도와의 정책 매트릭스 또한 불가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폭발하는 기본소득 논쟁
이런 흐름에 조응해 이를 둘러싼 논의도 폭발하고 있다. 2010년 전후에 전개된 무상급식이 촉발한 복지논쟁을 떠올리게 하듯 논쟁은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20년 6월 사회정책에 관심 있는 학자와 연구자 모임인 ‘사회정책연구회’ 단체 대화방에선 100여 명의 연구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몇몇 학자가 이 의제를 놓고 열띤 공방을 벌였다.
이승윤 중앙대 교수, 백승호 가톨릭대 교수 등 ‘기본소득이 온다’의 주요 저자들과 양재진 연세대 교수와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등 이름하여 ‘복지국가론자들’ 사이에서 정책 공방이 있었다. 창립 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연구회의 회원 사이에서 한 의제를 놓고 수일째 번갈아가며 논쟁을 이어간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과열 양상을 띠기도 한 이 논쟁은 좀체 접점을 찾지 못했다. 애초 단체대화방에서 텍스트로 감당할 수 없는 논쟁이었다.
8월 21일에는 한국사회복지학회가 ‘기본소득, 한국 복지체제의 대안인가’란 주제로 복지학계 차원의 논의 장도 열었다. 복지계 대표선수 간의 공방전이라 할 만했다. <기본소득이 온다> 대표 저자 중 한 명인 백승호 가톨릭대 교수가 한국 소득보장제도의 혁신 방안 하나로 ‘공유부 배당의 기본소득’을 발표했고, 최영준 연세대 교수가 기본소득 역할을 제시했다.
이에 맞서 홍경준 성균관대 교수가 ‘기본소득제를 비판하는 세 가지 이유’를 발표하며 기본소득에 강하게 비판하는 포문을 열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공위원장이 ‘기본소득보다 전 국민 사회보장’을 피력하며 기본소득론의 허점을 파고들었다(자세한 쟁점 논의는 기본소득 논쟁 2회에서 소개한다). 이 밖에도 기본소득의 정책화 가능성을 짚어보는 공청회와 토론회, 세미나가 줄을 잇고 있다.
각종 학술 매체도 논쟁에 기름을 부으며 가세했다. 계간 <창작과 비평>은 이일영 한신대 교수의 사회로 양재진 연세대 교수와 윤홍식 인하대 교수,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등판시켜 긴급 대담을 벌였다. 학술무크지인 <동향과 전망>에서도 기본소득 특집 대담을 실었다. 정통 학술지인 <경제와 사회>(12월호)에서도 관련 논문 다섯 편을 게재하며 논쟁에 불을 붙일 예정이다. 국책연구기관 중에선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2021년 연구과제로 기본소득을 채택했다. 경기도는 경기연구원,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등과 함께 9월 11일 비대면 온라인 방식으로 ‘제2회 경기도 기본소득 국제컨퍼런스’를 연다.
동명 다형의 기본소득 시대
논쟁과 토론이 더 복잡해졌고, 이 과정에서 길을 잃는 일도 허다하다. 토론자를 비롯한 많은 이가 기본소득을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기본소득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 기본소득, 부분 기본소득, 전환기적 기본소득 등 기본소득이란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인 류도 여럿이지만, 참여소득, 안심소득, 생애선택기본소득 등 새롭게 제시된 ‘창조적 변종’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본소득론은 더는 단수가 아닌 복수인 것이다. 어떤 기본소득인지 분별없이는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 이름은 같되 형태는 다른, 이른바 ‘동명다형(同名多形’)의 기본소득 시대의 창(窓)이 열린 것이다.(계속)
g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