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대한항공 주총에서 조양호 회장이 이사 연임에 실패한 것은 갑질과 불법행위로 기업가치와 주주이익을 훼손한 재벌총수(대주주)를 주주의 힘으로 회사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서 축출한 첫 사건이라는 점에서 한국 재벌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총수 일가의 갑질과 불법행위가 끊이지 않아 ‘오너 리스크’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인 한국 재벌들에게 ‘비상’이 걸리게 됐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재벌 총수는 권한만 행사하고, 책임은 제대로 지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불법행위를 저질러 형사처벌을 받아도 계속 경영권을 행사하는 관행이 이어졌다. 여론의 비난에 밀려 일시적으로 물러난 뒤 기억이 희미해지면 다시 복귀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2008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비자금 의혹 사건으로 경영에서 퇴진했다가 2년 만에 복귀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조 회장의 이사회 축출을 계기로 재벌 총수들의 이런 ‘황제경영’ 관행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 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은 “재벌 총수도 불법행위를 하면 주총에서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분석했다.
앞으로 제2, 제3의 조양호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지난해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 책임 원칙)를 도입한 국민연금은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로 조 회장의 이사 연임 부결에 주도적인 구실을 한 데 이어 앞으로도 비슷한 사안에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또 이번 사태가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에 대한 대한항공 직원들의 집단행동에서 촉발됐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2014년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과 지난해 조현민 전 전무의 ‘물컵 갑질’ 등을 겪으면서 새 노조를 꾸리고 총수 일가 퇴출 집회를 여는 등 회사 주인으로서의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박창진 대한항공 전 사무장(직원연대노조 지부장)은 “회장이 과연 물러날까 하는 정서가 조직 내부에 퍼졌는데, (그것이) 가능하다는 게 증명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장 올해 10월 사내이사 임기 만료를 앞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거액의 뇌물을 준 혐의로 1·2심에서 잇달아 유죄선고를 받았다. 대법원 판결을 남겨두고 있지만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얽혀 있는 이 부회장이 무죄로 풀려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중론이다. 국민연금이 조양호 회장에게 적용한 잣대를 이 부회장에게 동일하게 들이대면 이사 연임 안건에 찬성하기는 힘들다. 국민연금이 반대하고, 대한항공 주총 때처럼 국내외 대표적 의결권 자문사인 아이에스에스(ISS)와 기업지배구조원 등이 모두 반대를 권고하면 치열한 표 대결이 예상된다.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 일가와 삼성 계열사, 임원 등 특수관계인 지분은 지난해 9월 기준 19.54%에 그친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 지분 9.25%를 보유하고 있고, 외국인 지분은 50%를 넘는다.
일부 재벌은 대한항공과 유사한 사태를 막기 위해 경영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자율개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원은 “총수들의 불법행위로 기업가치와 주주이익이 훼손되는 이른바 ‘오너 리스크’의 가능성이 있는 재벌은 이번 조양호 회장 사건을 보고 대책 마련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선 이번 사태를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에 비유하며, 재벌의 ‘황제경영’에 종지부가 찍힐 날도 머지않았다는 기대 섞인 예상도 한다. 채이배 의원은 “재벌 총수들이 경영 전횡을 고치고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벌개혁을 속단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재계는 ‘연금사회주의’라는 표현을 동원하며 대한항공 사태의 확산을 경계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배상근 전무 명의로 낸 성명에서 “국민연금의 결정은 조 회장이 그동안 대한항공의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노력해온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며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보다 신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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