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진통 끝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안에 반대하기로 했다. 대한항공 지분 11.7%를 보유한 2대 주주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지기로 함에 따라, 27일 열리는 대한항공 정기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연임을 놓고 치열한 표대결이 펼쳐지게 됐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26일 오후 회의를 열어 ‘대한항공 조양호 사내이사 선임의 건’에 대해, 조 회장이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 침해의 이력이 있다고 판단해 반대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날 수탁자책임위는 주주권행사분과 위원 간 의견이 팽팽히 맞서 결론이 나지 않자 책임투자분과 위원까지 급히 소집할 정도로 진통을 겪었다. 뒤늦게 합류한 책임투자분과 위원들이 사내이사 선임안에 반대표를 던지면서 가까스로 회의가 마무리됐다. 앞서 수탁자책임위 주주권행사분과위는 25일 저녁에도 같은 안건을 놓고 심의했지만 위원들간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26일 재논의를 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쟁점은 조양호 회장의 주주가치 훼손행위에 대한 판단 여부였다. 경총 추천위원 등은 법원 1심 판결 뒤 의결권행사 적용을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노총 추천위원 등은 주주가치 훼손행위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이 있는 경우 검찰 기소 시점부터 적용할 수 있다고 맞섰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 납품업체들로부터 196억원 어치의 ‘통행세’를 수수하고, 자신의 형사사건 변호사 비용을 회삿돈으로 지출한 횡령 혐의 등으로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날 “조양호 회장은 회사와 연관된 여러 건의 횡령·배임·사기 등 범죄혐의로 재판이 진행중인 상황이기 때문에 대한항공 이사직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주주가치를 훼손하고 기업의 가치와 평판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했지만, 일부 전문위원들은 사내이사 선임에 찬성해야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2대 주주인 국민연금(11.7%)이 반대표를 던짐에 따라 27일 오전 주총에서 조 회장의 대표이사 선임 가능성은 불투명해졌다. 조 회장이 재선임되려면 대한항공 정관상 주총 출석주주의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조 회장 일가와 한진 계열사 등 특수관계인 보유 지분은 33.34%다. 국외 기관투자자들은 조 회장의 연임안에 이미 반대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한 상태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의결권 광장 누리집을 보면,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투자공사(BCI)와 캐나다연금(CPPIB), 미국 플로리다 연금(SBA Florida)이 연임 반대를 밝혔다.
진통 끝에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책임 원칙)를 지키게 되었지만 이번 결정 과정에서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 방향을 사전에 공시해야할 중점관리기업 대한항공의 주총을 엿새 앞둔 21일에서야 투자위원회를 열어 수탁자책임전문위에 안건을 회부했다. 수탁자책임위원들이 충분히 의견을 청취할 시간도 없었고, 공론화를 통해 다른 기관투자자들이 이같은 결정을 참고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한편 수탁자책임위는 최태원 회장의 에스케이(SK) 사내이사 선임 건에 대해서도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 침해 이력이 적용된다고 판단해 반대 결정을 내렸다.
이완 기자, 곽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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