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6차 경제활력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직생활을 33년 하면서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소신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아프게 생각한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의원들이 ‘청와대 바지사장’이라고 몰아붙이자 이렇게 답했다. 2월1일로 취임 54일째를 맞은 홍 부총리는 실제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의 발걸음이 바빠질수록 문재인 정부가 애초 내세웠던 ‘소득주도성장’의 흔적은 지워지고 과거 보수정권이 애용하던 사회간접자본(SOC)을 통한 경기부양책과 대기업 투자 중심 경제정책은 힘을 얻고 있다.
비주류·워커홀릭·정통관료
지난해 11월 경제현안과 정책을 두고 이견을 표출하며 ‘불협화음’을 냈던 1기 경제팀의 장하성-김동연 ‘투톱’을 문책성으로 교체하면서 청와대는 “경제사령탑은 홍남기 부총리”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무색무취한 이미지의 홍 부총리를 선택해 청와대가 경제정책을 주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해석이 나온 이유는 홍 부총리와 함께 2기 경제팀을 이끄는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대통령의 최측근, ‘실세 실장’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김 실장은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사회정책비서관, 환경부 차관 등을 맡았고,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는 첫 사회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김 실장을 임명하며 청와대는 “현재 정부의 국정과제를 설계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현 정부 출범 뒤 부동산, 탈원전, 교육, 문화, 여성 정책을 두루 다뤄 ‘왕수석’으로 통했다.
반면 홍 부총리는 박근혜 정부 때도 중용됐던 정통 경제 관료다. 행정고시(29회) 합격 뒤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박근혜 정부의 인수위원회에 참여했고 청와대 기획비서관을 거쳐 미래창조과학부 1차관을 맡았다. 현 정부 출범 뒤 공직에서 물러날 것으로 예측됐지만 그는 이낙연 총리를 보좌하는 국무조정실장(장관급)으로 발탁됐다. 노무현 정부의 핵심인사였던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추천이 있었다는 소문이 많았다. 홍 부총리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변 정책실장의 보좌관을 지냈다.
이 총리와는 처음 인연을 맺었지만,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꼼꼼하고 성실한 데다 자신을 낮추며 상대방과 소통한다”는 평가가 많은 홍 부총리의 일처리 스타일을 이 총리가 높게 봤다고 한다. “일할 시간을 늘리려고 화장실 갈 때도 뛰어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홍 부총리의 ‘워크홀릭(일중독)’은 유명하다. 한장짜리 보고서를 주문하면 몇십 쪽의 논문으로 써왔다고도 하고, “물고기를 잡아 오라면 물을 퍼낸다”는 비유도 회자된다. 홍 부총리는 “일을 하면 되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실행력에 힘을 쓰면서 상당 부분 직접 한다”고 자신의 일 스타일을 말한다.
하지만 기재부 안팎에서 홍 부총리가 명실상부한 ‘경제사령탑’이 되리라고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거시경제(재정경제부)가 아닌 예산·재정정책(기획예산처) 출신인 데다 예산실장·기재부 차관 등 주요 보직을 거치지 않은 소위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문재인 정부의 ‘혁신적 포용 국가’를 실현할 개혁적 성격의 인물로도 분류되지 않았다. 실제 차기 부총리로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전·현직 경제 관료들은 청와대 인선 배경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을 보였다. 홍 부총리 자신도 청와대가 인사 검증에 들어갔을 때까지도 부총리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부총리 지명 뒤 첫 기자간담회에서 그가 “역량이 부족함에도 과분한 직책의 후보자로 지명됐다”고 말했던 이유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왜 홍 부총리를 선택했을까. 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0일 홍 부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며 “홍 부총리가 아주 열심히 하는 모습을 평소에 잘 알고 있으며, 그 성실함을 눈여겨봤다”고 말했다. 홍 부총리는 문 대통령을 1년 이상 매주 만났다. 문 대통령은 해외 순방이 아니면 이낙연 총리와 매주 월요일 점심에 회동했는데 홍 부총리는 빠짐없이 그 자리에 배석했다. 홍 부총리는 “대통령과 총리의 (국정 현안) 논의를 지켜보며 정부 정책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알 기회를 얻었다. 큰 자산이다. 또 (대통령) 보고도 많이 드렸는데 (부총리 임명에)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다”고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말한 바 있다.
엇박자는 더이상 없다
‘청와대 바지사장’이라는 야당의 비판과 달리, 홍 부총리는 지난해 12월4일 국회 인사청문회 때부터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 우선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해 보완책으로 ‘최저임금 결정 구조 이원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기존의 최저임금위원회에다 최저임금 상·하한 구간을 설정하는 구간설정위원회를 추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최저임금 결정의 예측가능성과 객관성이 확보되고 인상 속도는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 홍 부총리의 설명이다. 전임 김동연 부총리도 “최저임금 결정 제도를 바꿔 시장이 예측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했지만, 홍 부총리처럼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진 않았다. 이후 노동계의 반대에도 최저임금 결정 구조 이원화는 2월까지 마무리한다는 목표 아래 빠르게 추진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홍 부총리 취임 한 달 만에 개편안 초안을 공개한 뒤 지난 1월에 토론회 등 의견 수렴을 거쳤다.
경제정책 방향을 두고도 청와대와 부총리의 엇박자는 더는 보이지 않는다. 애초 예측과는 반대로 기재부 안팎에서는 “홍 부총리가 ‘청와대 예스맨’이 된 게 아니라 청와대가 홍 부총리의 의견을 따른다”는 것이 대체적 시각이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홍 부총리는 소득주도성장 정책과 관련해 “시장에서 애로를 제기하는 일부 정책에 대해서는 시장과의 소통, 면밀한 분석을 통해 보완해나가겠다”고 말했다. 2주가량 지난 뒤 문 대통령은 첫 확대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며 홍 부총리와 비슷한 발언을 이어갔다. “최저임금 인상과 같은 새로운 경제정책은 경제·사회의 수용성과 이해관계자의 입장을 조화롭게 고려해 국민의 공감 속에서 추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요한 경우 보완조치도 함께 강구해야 할 것이다.“ 문 대통령이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해 ‘수용성’을 언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정부의 경제정책이 시장과 기업 쪽으로 무게추를 옮긴 것도 홍 부총리의 취임 후 변화다. 첫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기업 투자를 늘려 경제 활력을 불어넣는데 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고, ‘2019년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며 1순위 과제로 ‘전방위적 경제활력 제고’를 내세웠다. “경제활력을 높이기 위해 재정·금융·규제혁신 등 모든 정책수단을 동원해 민간·공공투자를 지원하겠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공공인프라 투자 확대를 제시했다. 지역경제 파급효과가 큰 광역권 교통·물류 기반 등 국가균형발전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사업을 뽑아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면제하겠다는 것이다. 지난달 29일 기재부는 남북내륙철도, 새만금국제공항 등 전국 16개 지역의 23개, 24조1천억원 규모의 사업을 예타 면제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 가운데 에스오시(SOC) 관련한 사업만 20조원 안팎에 이른다. 에스오시 예타 면제는 과거 보수정권의 단골 메뉴였다. 이명박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4대강 사업을 비롯해 30대 프로젝트의 예타를 면제한 바 있다. “기업 투자 촉진과 토건사업에 올인하는 관료주의적 경기부양책으로 회귀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홍 부총리의 행보가 이어질수록 문재인 정부가 표방하던 과거 정부와의 차별성은 옅어지고 있는 셈이다.
정부의 경제정책이 역주행하는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지만 홍 부총리는 “기본적으로 소득주도성장·혁신성장·공정경제가 함께해서 궁극적인 포용국가를 달성하려는 방향은 명확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다만 속도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득주도성장은 보완하고, 혁신성장은 속도감을 높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보장 확대, 사회안전망 강화 등 소득주도성장의 보완책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내놓은 것이 없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 4차 경제활력대책회의를 마친 후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폭로한 ‘국채 발행 압력 의혹’에 대한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역주행 우려 커져
홍 부총리가 전임 김동연 부총리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들이 있다. 첫째, ‘장하성-김동연’ 시절과 달리 불협화음이 없다. 김수현 실장이 홍 부총리가 경제사령탑이라고 강조하며 몸을 낮추기도 하지만, 홍 부총리도 청와대와 긴밀히 소통하며 ‘돌발 발언’을 하지 않는다. 특히 경제팀 내부적으로 조율은 치열하게 하되 대외적 표현은 일차적으로 홍 부총리가 한다는 원칙이 분명하다. “김수현 실장과는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서 같이 일했던 개인적인 친분도 있다. 매주 금요일 둘이 같이 점심을 먹는다. 대통령 행사에서 만남을 포함해 하루 네 번 만나기도 한다. 소통 측면에서 전혀 벽이 없다.” (1월30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
둘째,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홍 부총리는 취임식 때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중소·중견기업, 대기업의 기업인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부총리가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매주 현장을 방문해 경제단체장, 소상공인연합회, 자동차 부품업체, 수출기업, 자영업자 등을 만나고 있다. 기재부 내부의 소통도 한층 탄탄해졌다. 홍 부총리는 취임 초 기재부 국·과장이 원칙적으로 정부세종청사에 머물며 사무관 등과 자주 만나도록 지시했다. 부총리 자신도 세종에 머무는 시간을 대폭 늘렸다. 부총리 보고도 대면을 고집하지 않고 화상회의 등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기재부 공무원들은 “부총리 보고가 한결 수월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홍 부총리는 “소통하고 조정하는 능력은 남들만큼 갖고 있다”고 자신한다.
셋째, 예측가능성을 높였다. 홍 부총리는 “예측가능성과 효율성은 비례한다고 생각한다”고 기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미국) 워싱턴 재정관을 3년 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다른 게 뭘까 살펴보니 결론은 예측가능성이었다. 그래서 예측가능성이 높게 작업하니까 효율성도 높은 거였다. 예를 들면 고속도로 출구 번호는 마일을 뜻한다. 100번에서 들어가 170번으로 나갔다면 70마일을 달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행정에도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작업을 많이 도입하면 좋겠다.” 실제로 홍 부총리가 지난 두 달간 추진한 경제정책은 국회 인사청문회 때 대부분 언급했던 내용이다. 최근 나온 ‘가업 상속세 요건 완화’나 ‘광주형 일자리 2~3개 더 만든다’는 소식도 이미 운을 뗀 바 있다. 여기에 구체적인 내용과 시기를 추가로 밝힌 것이다. 기재부는 홍 부총리의 지시에 따라 2019년 경제정책 방향을 96개 주요 세부과제로 나눠 추진상황을 매월 점검한다. 추진 속도를 더욱 높일 뿐 아니라 어려움이 예상될 경우 먼저 보완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홍 부총리의 취임 뒤 두 달간 발자취를 보면, ‘패싱(열외)’ 논란이 거듭됐던 전임과 달리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꼼꼼한 일처리와 소통하는 리더십 덕분에 혁신성장의 속도를 높이는데 확실히 성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행보가 과거 대기업 중심의 성장 패러다임을 ‘사람 중심 경제’로 바꾸려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 틀과 기본까지 뒤흔들 수 있다는 점이다. 최배근 건국대 교수(경제학)는 “홍 부총리는 기업 투자 감소를 성장률 둔화의 원인으로 진단하고 그 성격이 무엇이든 기업이 돈을 쓰게 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경제 인식과 정책의 부활이다. 안타까움을 넘어 절망감이 밀려온다”고 혹독하게 평가했다. 그가 내딛는 활기찬 발걸음에 박수만을 칠 수 없는 이유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