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은 SUV, 다음 달은 경차, 그 다음 달은 외제차, 대체 차가 몇 대야? 차가 매달 바뀌네.” 상상이 현실이 됐다. 자동차도 구독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신문처럼 매달 구독료를 내고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받아 쓰는 구독경제, 옷, 화장품, 전자책은 물론 자동차나 미술작품도 구독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 것인 듯 내 것이 아닌, 내 것 같아졌다.
나는 지난해 겨울, ‘코트 부자’로 살았다. 겨울 옷 특성상 코트 값은 비싸면 수십만원까지 드는데, 나는 매주 새로운 코트를 입고 다녔다. 물론 그 코트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전국의 여성들과 코트를 공유했다.
에스케이플래닛이 만든 ‘프로젝트앤’이라는 패션 공유 서비스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2016년 9월 만들어진 이 서비스는 누적 가입회원 40만명(2018년 3월 기준), 이용권 판매 3만3천건을 기록했다. 프로젝트앤은 모바일 앱을 통해 9만9천원짜리 월 정액권을 끊으면 한 달에 옷 4벌(한번에 한벌씩 최장 한달)을 빌릴 수 있었다. 원하는 옷을 골라 입은 후 다시 새로운 옷과 교환하면 됐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디자인과 몸에 맞는 사이즈의 옷을 차지하긴 쉽지 않았다. 빨리 클릭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더구나 코트 같은 고가의 옷을 빌릴 때는 회비가 아깝지 않았지만 봄이 되면서 얇은 옷을 입게 되니 한벌당 2만5천원꼴이어서 돈이 아깝게 느껴졌다. ‘자라’ 같은 패스트패션 브랜드 상품은 2만~3만원이면 티셔츠나 니트를 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비스를 해지하진 않았다. 좁은 집에 옷을 보관하지 않아도 되고, 돌려줄 때 세탁을 안 해도 된다는 점이 좋았다. 옷을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니 어느 정도 홀가분하기도 했다.
‘줄라이’는 의류를 정해진 요일에 격주 단위로 새벽배송 해주는 서비스다. 문 앞에 입었던 옷을 세탁 없이 걸어 두기만 하면 새로운 옷과 교체할 수 있다. 사진은 기자의 집 현관에 걸려 있는 줄라이의 배달의류. 신지민 기자
패션구독 체험해보니 그러나 ‘옷 부자’ 생활은 몇달 만에 끝났다. 이 패션공유 업체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이미 공유에 적응된 나는 옷을 사는 데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옷장은 이미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이 많은 옷을 언제까지 짊어지고 살아야 하나 싶어질 때쯤, 다른 패션공유 서비스가 등장했다. 이번엔 그냥 공유가 아니라 ‘구독’이라고 했다.
‘패션구독업체’를 표방하는 ‘줄라이’는 나에게 맞는 옷을 정해진 요일에 격주 단위로 새벽배송 해주는 서비스다. 문 앞에 입었던 옷을 걸어 두기만 하면 새로운 옷과 교체할 수 있어 세탁이나 보관 걱정 없이 2주간 마음껏 입고 반납하면 된다. 한달 이용료는 7만8천원이다. 이 업체는 사이트에 입력한 정보를 토대로 나에게 맞는 옷을 전문 스타일리스트가 협력해 추천해준다. 고객은 추천된 옷 2가지 중 하나를 택하면 된다. 나에게 맞는 옷을 고르는 번거로움은 덜어내고, 최종 선택만 하면 되는 일종의 ‘퍼스널 쇼퍼’인 셈이다.
지난달 회원가입을 하면서 내 신체사이즈를 입력했다. 좋아하는 패턴도 고르고, 싫어하는 색깔도 적었다. 배송 3일 전에 카카오톡으로 두 가지의 추천 의상이 왔다. 연보라색 코트와 니트·원피스 세트 중에 고르라고 했다. 고민끝에 연보라색 코트를 골랐다. 연보라색은 튀는 색이라 구매까지 생각하진 않겠지만, 어차피 2주만 입고 돌려줄 것이므로 부담 없이 선택했다. 배송된 옷들의 디자인은 마음에 드는지, 사이즈는 내 몸에 맞는지 피드백도 보냈다. 업체 쪽은 다음번엔 내게 더 맞는 옷을 추천하겠다고 했다.
프로젝트앤과 줄라이는 옷을 소유하지 않고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점은 같았다. 그러나 프로젝트앤은 내가 직접 옷을 골라서 대여하는 것이었고, 줄라이는 업체에서 옷을 골라서 정기적으로 보내준다는 점에서 달랐다. 내가 직접 고른다는 점이 프로젝트앤의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단점이기도 했다. 언제 원하는 옷이 입고될지 몰라 자주 사이트에 들락날락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때가 되면 알아서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보내주는 것은 줄라이의 장점이었지만, 보내준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점이 되기도 했다.
옷뿐만이 아니다. 책들도 ‘구독’으로 읽는다. 월정액 전자책 대여 서비스업체인 ‘밀리의 서재’는 한달에 9900원만 내면 무제한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모든 책이 다 있는 건 아니지만 베스트셀러나 화제가 된 책은 대부분 구비돼 있고, 나의 독서 이력에 따라 맞춤 추천도 해준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스마트폰으로 틈틈이 책을 읽었더니 종이책을 사서 읽는 것보다 많은 양의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퇴근 후엔 온라인동영상 서비스 ‘넷플릭스’(월정액 9500원)에서 추천해주는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 2주에 한번씩은 꽃구독 서비스업체인 ‘꾸까’(월 6만2천원)에서 보내주는 꽃으로 거실 테이블을 장식한다. 옷을 사러 옷가게에 가지 않아도 된다. 서점에도, 꽃집에도 갈 필요가 없다. 집에 가만히 있어도 내가 원하는 상품을 집앞까지 갖다주는 세상이 됐다.
’밀리의 서재’는 월정액 9900원으로 전자책을 무제한으로 읽을 수 있는 서비스다. 독서 이력에 맞춰 책도 추천해준다. 밀리의 서재 화면 갈무리
일상에 스며든 구독경제
구독경제(subscription economy)는 매달 일정 금액을 내면 자동차, 식재료, 의류, 생필품을 정기적으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말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빠르게 성장하면서 일상에 스며들고 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구독경제를 사업 아이템으로 삼은 스타트업만 해도 300여곳에 이른다.
구독 산업은 글로벌 금융 위기 후인 2010년대 초반 미국에서 처음 생겨났다. 경제 저성장 분위기에서 화장품, 면도날 같은 생활 소모품을 소포장으로 낮은 가격에 정기 배송해주는 서비스가 인기를 끌었다. 큰돈을 들여 소유하는 것보다는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것이 효율적이란 인식이 확산되면서다. 품목도 다양해졌다. 음악, 영상, 전자책은 물론 옷, 화장품, 미술 작품에 이어 자동차까지 구독이 가능해졌다. 구매패턴이나 소비성향을 분석해 추천 상품을 배송해주는 맞춤형 서비스로도 진화하고 있다. 스위스의 금융기관 크레디스위스는 2015년 474조원이었던 세계 구독경제 시장 규모가 2020년에는 600조원에 육박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달 자동차 구독형 서비스를 출시했다. 제네시스의 월간 구독 프로그램 ‘제네시스 스펙트럼’(월 149만원)을 지난달 13일 출시한 데 이어 지난 7일에는 현대차를 교체하며 탈 수 있는 ‘현대 셀렉션’(월 72만원)을 선보였다. 10개월 동안 제네시스 브랜드와 현대차 브랜드의 모든 차종을 바꿔가며 탈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월정액을 내고 원하는 차를 골라 탈 수 있는 서비스다. 기존의 리스나 장기 렌털은 계약기간 동안 계약된 차만 이용해야 하는 반면, 차량 구독은 월 단위로 다양한 차를 이용할 수 있다. 차에 대한 유지·보수의 책임이 없고 정비나 소모품 관리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베엠베(BMW)도 국내에서 지난해 11월, 베엠베 미니 전체 모델을 대상으로 ‘올 더 타임 미니’를 출시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볼보, 캐딜락, 포르셰 등이 구독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이처럼 자동차 제조 회사가 ‘서비스 회사’로 변하고 있다는 것은 제조한 제품을 파는 것만으로도 비즈니스가 되던 시대가 끝나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버나 리프트 같은 카셰어링 서비스가 보편화된 나라에선 굳이 차를 소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화장품 업계에도 구독경제 바람이 불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스테디’, 애경산업의 ‘플로우’, 중소기업들인 ‘톤 28’과 ‘먼슬리 코스메틱’ 등이 월정액을 내면 화장품을 피부주기별로 매달·계절별로 집으로 배송해준다. 각각의 프로그램이 조금씩 다르지만 소비자의 피부 타입에 기반해 맞춤형 화장품을 보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비자로서는 화장품 회사가 직접 자신의 피부를 관리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국내 최초로 꽃 구독 서비스를 론칭한 ‘꾸까’를 비롯해 ‘꽃사가’ ‘데일로즈’ ‘어니스트플라워’ ‘두시’ ‘플로잉3’ 등 소규모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플로리스트가 만든 장식용 꽃을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서비스도 늘고 있다. 화병, 꽃바구니 등 업체마다 제공하는 서비스가 다양하다. 캔들, 디퓨저 등 다른 소품과 결합하거나 소비자가 직접 완성품을 만들 수 있는 서비스도 제공된다.
매월 최저 3만9천원에 3개월에 한번씩 미술가의 미술 작품을 배송해주는 ‘오픈갤러리’ 같은 업체도 있다. 이용료가 만만치 않지만 고가의 작품을 직접 사는 것보다는 부담이 적고 주기적으로 작품을 바꿔 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 7일 월정액을 내고 현대차 브랜드의 모든 차종을 바꿔가며 탈 수 있는 서비스를 출시했다. 현대자동차 제공
구독경제 확산 왜?
소비자의 경제 활동이 소비자가 상품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기업에게 돈을 내는 ‘상품경제’에서 소비자가 일정 기간
점유권을 갖고 쓴 만큼 기업에 돈을 지급하는 ‘공유경제’로, 나아가 소비자가 회원권을 갖고 쓴 만큼 기업에 돈을 치르는 ‘구독경제’로 진화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구독경제가 아주 새로운 방식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신문 구독도 구독경제라고 할 수 있다. 월 구독료를 내면 상품을 정기적으로 배송하는 방식, 구독료를 납부한 뒤 정해진 기간 동안 상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방식, 기존의 렌털 방식 등이 넓게 보면 모두 구독경제다. 이미 있던 방식이지만 최근 더 확산되고 구독 품목이 다양해지는 이유는 인터넷기술의 발달로 디지털 플랫폼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의 성향에 따라 맞춤서비스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구독경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최근 구독경제의 주요 소비자는 20~30대다. 2030세대가 소유보다는 경험에 더욱 의미를 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트렌드 전환 주기가 빨라지고 짧은 기간 동안 더 많은 것을 경험하는 방향으로 소비패턴이 변하고 있는 것도 구독경제 확산의 한 원인이다. 유행이 빨리 변할수록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도 더욱 어려워지는데, 구독경제는 구독 이력을 기본으로 전문가에게 추천을 받을 수 있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직접 고르거나 주문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구독 이력 데이터를 축적해 시장선호도나 고객들의 소비패턴 등의 정보를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정 기간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고객 충성도를 높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은 저서 <라이프 트렌드 2019 젠더 뉴트럴>에서 “구독경제는 소비자가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 없이 구매와 소비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 또 “기업 쪽에서는 월정액을 통해 안정적 매출을 확보하는데다 월정액이 유지되는 한달간은 고객을 붙잡아 둘 수 있다. 업체가 큐레이션을 얼마나 잘하는지, 얼마나 서비스의 질이 좋은지가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