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 국가들 ‘1인당 소득 3만달러’ 될 때 평균 성장률 2.3%
미·일·독·프·영 등 규모있는 선진국들 모두 2.7% 이하로 ‘통과’
‘불경기 때 정부 곳간 풀어 부양’도 상식인데 과도한 비난 왜?
미·일·독·프·영 등 규모있는 선진국들 모두 2.7% 이하로 ‘통과’
‘불경기 때 정부 곳간 풀어 부양’도 상식인데 과도한 비난 왜?
“세금 풀어 떠받쳐도 6년 만에 최저성장”(조선일보)
“정부 총력전에도 작년 성장률 2.7%…6년 만에 최저”(중앙일보)
“작년 韓 성장률, 선진국 미·호주보다 낮아”(매일경제)
“정부 돈 풀어 겨우 맞춘 성장률 2.7%”(한국경제)
22일 한국은행이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이 2.7%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한 이튿날, 대표적인 보수지·경제지 지면을 장식한 기사 제목들입니다. “정부가 돈 풀어 기껏 6년 만에 최저성장”이냐는, 문재인 정부가 ‘형편없는 경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며 한껏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요?
■ 2.7% 성장, 낮은 것일까?
일단 수치상 2.7% 성장이 6년 만에 최저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최저’를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한국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 뒤인 2012년(2.3%) 이후 2%대 중후반 언저리 성장률을 이어왔고, 지난해에도 2.7%로 그런 ‘저성장 박스권’에서 횡보를 이어갔습니다. 예상치 못한 ‘최저치’가 나온 게 아니라, 그냥 그저그런 수준을 이어나갔다는 것이죠.
한국경제가 2%대 저성장 터널에 들어선 데에는 여러가지 구조적인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도전의식이 사라진 재벌들이 지배하는 경제생태계,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문화, 경직되고 이중화된 노동시장, 타협과 양보를 끌어내지 못하는 리더십, 저출산 고령화 등등….
그런데 함께 봐야 할 요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경제의 크기입니다. 한국경제는 국내총생산 기준 세계 11~12위, 교역규모로는 세계 8~9위권입니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처럼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즉 선진국이 될수록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기란 어려워집니다.
외국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들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달러를 돌파하던 해 성장률을 살펴봤습니다(한국은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그 결과 23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이 3만달러가 되던 해 평균 성장률은 2.3%였습니다. 한국은 평균보다 높은 속도(성장률)로 ‘1인당 국민총소득 3만달러’ 구간을 통과했다는 얘기입니다.
23개국 가운데 한국보다 높은 성장률로 1인당 국민총소득 3만달러를 통과한 나라는 9개였습니다. 오스트리아(2003년·5.8%), 덴마크(1995년·9.6%), 아일랜드(2002년·3.8%), 노르웨이(1995년·4%), 스위스(1988년·4.2%), 뉴질랜드(2007년·3.8%) 등 한국과 직접 비교가 어려운 유럽(형) 소국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인구 5천만명 이상에 제조업 기반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 한국과 비교 가능한 일본(1992년·2%), 영국(2003년·2%), 독일(2003년·0.8%), 프랑스(2004년·2.7%)는 모두 ‘저속’ 통과였습니다. 요새 보수언론들이 한국보다 높은 성장률을 구가한다며 칭송해 마지않는 미국(1997년·2.3%)도 마찬가지고요.
선진국 중의 선진국이랄 수 있는 주요 7개국(G7, 미국·캐나다·프랑스·독일·이탈리아·일본·영국) 평균 통과 속도도 2.3%였습니다. 결국 2.7%란 성장률은 그닥 이상한 게 아닙니다. 한국은행도 22일 성장률을 발표하며 “(인플레이션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고 나라 안의 자본과 노동 등 자원을 동원해 최대한 이뤄낼 수 있는) 잠재성장률 수준의 성장을 이뤄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언론의 기사에서 이 설명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현재 한국경제를 둘러싼 대내외 환경이 만만치 않고 풀어야 할 많은 과제가 많습니다. 또 우리보다 ‘속도’가 높았던 나라가 9개나 된다며,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후 맥락 없이 무조건 ‘성장률이 낮다’ 하나만을 내세워 독설을 쏟아내는 것은 얼마나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 정부 곳간 털어 경기부양이 죄악?
낮은 성장률과 더불어 언급된 비난의 양대 축은 ‘세금을 써서’란 것입니다. ‘나라 곳간 풀어 성장 턱걸이’(서울경제), ‘혈세 푼 덕에 그나마 2.7% 성장’(이데일리) 등 기사뿐 아니라, ‘국민 세금 퍼붓기로 2.7% 성장, 세금 주도 성장은 지속 불가능하다’(조선일보), ‘언제까지 재정 땜질에만 의존할 건가’(서울경제), ‘재정으로 만든 성장’(국민일보) 등 사설에서도 정부 비판의 주요 근거로 제시됐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역사나 거시경제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이들에게, 경기가 나쁠 때 정부가 돈을 풀어 부양에 나선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입니다.(정부가 돈 안풀고 뒷짐지고 있었다면 이들이 잘했다고 칭찬했을까요?) 경제분야 사설을 쓸 정도라면 그 정도 상식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결과적으로 정부가 ‘공공의 자금’인 세금을 빼내 낭비한다는 식의 파퓰리즘적 선동들이 넘쳐났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반감이 큰 언론사일수록 비난의 강도도 컸습니다. 그 과정에 오버도 보입니다. ‘4분기 벼락치기 재정투입’(조선일보 기사 부제)이 대표적입니다. 재정이란 게 벼락처럼 내려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산은 국회 동의를 거쳐 집행되기 때문입니다. 또 정부가 경기부양에 나설 경우엔, 주로 연초에 집중적으로 예산을 집행합니다. ‘지난해에는 지방선거가 있어 7월에 지방정부가 출범하면서 조직 정비 등을 거치느라 3분기에 재정을 덜 집행했고 4분기에 이 부분까지 합쳐서 집행됐다’는 한은의 친절한 설명은 어디 간 것일까요. 지방정부가 3분기에 쓸 몫을 4분기로 넘겨 일부 집행한 것을 왜 ‘(중앙)정부가 벼락치기 재정투입’에 나섰다고 하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물론 정부의 재정이 효율적으로 집행되는지, 그 규모가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는지는 언론이 충분히 들여다보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후 맥락을 자른 채 ‘세금 쏟아부어서’라며 비난하는 것은 해당 언론사의 ‘본심’을 의심하도록 만듭니다. 또 여나 야, 진보나 보수보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살펴보려는 다수의 많은 대중들을 실망스럽게 합니다.
2018년 성장률이 발표된 뒤인 22일 오후, ‘대다수 언론이 ‘6년 만에 최저 성장률’을 제목으로 뽑는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한은 한 관계자는 “정말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규모를 생각해야지…. 독일 보세요. 지난 3분기 마이너스 성장했지만, 이렇게 안 시끄럽거든요. 내부에서 (기사들) 보면 곧 망할 것 같지만, 외국 상황까지 두루 보면 한국경제는 ‘중상’ 정도는 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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