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삼익홀에서 열린 에스케이(SK)행복나눔재단의 ‘제2회 사회혁신교육자네트워크(ENSI) 콘퍼런스’에 참여한 대학교수들은 사회혁신 교육이 제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대학의 끊임없는 지역사회와의 관계 맺기 실험과 대학·기업·지자체의 장기적인 자원 투자가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 박은경 연구원
지난해 5월, 서울 관악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삼익홀의 풍경.
삼삼오오 모여드는 관악구의 구의원, 공무원, 시민활동가들을 학생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연단 뒤엔 ‘시민정치 워크숍 및 관악 시민의 밤’이란 펼침막이 걸렸다. 홀을 가득 메운 120명의 참석자들은 6개의 테이블에 섞여 앉았다. 풍경은 여느 행사와 사뭇 달랐다. 단상과 단하의 구분도, 으레 교수와 전문가 이름이 적힌 명패 따위도 눈에 띄지 않는다. 참석자 누구나 함께 어우러져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자리 배치였다.
이날 행사는 2016년 2학기부터 ‘시민정치론’ 과목을 수강하며 관악구 시민정치를 연구한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학생들이 관악구의 풀뿌리 정치를 이끄는 사람들을 만나 정책제언과 토론을 벌이고자 마련한 자리였다. 행사장을 찾은 공무원들은 학생들의 의견을 들은 뒤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정책을 만들 때 꼭 참고하겠노라 약속했다. 어떤 대목에선 정책 수립과 실행 과정의 실상을 소개하며 좀 더 깊은 연구를 주문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날 학생들은 의정평가단을 제도화해 의정 평가를 공식적으로 지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이듬해 관악구 의정감시 조례 제정으로 이어지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시민정치론’ 수업을 이끈 김의영 교수가 올해 봄 펴낸 <관악구 시민정치>는 바로 이날 현장에서 오간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낸 결과물이다. 정치외교학부 학생 33명과 관악구 공무원·시민활동가 20여명이 지은이다.
■ 지자체, 대학을 도시재생 거점으로
대학과 지역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 도시의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등장한 배경은 대학과 지역사회 모두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대학과 주변 지역이 어우러져 상권이 형성되고 이른바 ‘대학 문화’가 번성했던 1970~80년대의 풍경은 이미 오래전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청년층은 구직난과 주거빈곤에 허덕이며 삶의 여유를 잃은 지 오래고, 대학 역시 치열한 경쟁 환경에 노출된 채 재정 악화와 학생 수 감소라는 위협과 맞서야 하는 처지다. 대학을 낀 지역사회의 활기가 덩달아 사그라지는 조짐을 보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대학과 지역사회가 모두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 동북4구 도시재생협력지원센터의 ‘사이사이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서울여대 학생들의 도시재생 수업 전경. 동북4구 도시재생협력지원센터 제공
눈여겨볼 만한 사례도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서울시가 2016년부터 시행 중인 ‘서울시 캠퍼스타운’ 조성 사업도 그중 하나다. 대학의 풍부한 역량과 자원을 청년실업 문제 해소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활용하려는 뜻이 담겼다. 사업 첫해에 1호 캠퍼스타운으로 지정된 고려대는 창업 아이디어가 펀딩까지 연결되도록 지원하는 청년창업공간 ‘스마트 스타트업 스튜디오’ 9곳을 교내에 운영하고 있다. 학교 쪽이 임차보증금을, 서울시가 리모델링 비용과 운영비를 각각 부담해,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공간을 지원하는 게 뼈대다.
도시재생 중간지원센터인 서울 동북4구 도시재생협력지원센터도 대학과 활발한 연계 사업을 진행하는 곳 중 하나다. 서울 강북의 성북·강북·도봉·노원 등 4개 자치구는 고려대, 서울여대 등 14개 대학이 자리잡은 대학 밀집 지역이다. 서울 시내 소재 52개 대학의 4분의 1이 넘는 수치다. 동북4구 도시재생협력지원센터는 지난해부터 도시재생을 열쇳말로 대학과 다양한 관계맺기 실험을 진행하는 중이다. 지난해 8월에는 지역 소재 대학을 초대해 대학과 지역사회 협력을 통한 도시재생 방안을 모색하는 포럼을 열기도 했다.
올해 하반기에 진행 중인 ‘사이사이 프로젝트’도 눈길을 끈다. 서울여대 시각디자인학과·공예학과 학생들과 함께 동북4구 지역자산을 발굴하고 이를 시각화한 디자인 작품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학생들은 주민들이 참여하는 마을 탐방여행에도 동행해 지역 주민들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정선철 동북4구 도시재생협력지원센터장은 “청년들의 지역 협력사업 경험은 이들이 앞으로 지역사회 활동 기반을 마련하고 시민사회 주체로 성장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며, “지역과 대학별 특징이 잘 어우러진 도시가 되도록 지역과 대학의 역할을 조율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경기청년협업마을에서 열린 ‘소셜픽션 워크숍’에 참여한 시흥 사회적경제활동가들과 서울대 학생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은 지난해 시흥형 사회적경제모델 연구 사업을 진행하며 현장 활동가들과 의견을 함께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제공
이처럼 새로 싹트기 시작한 대학과 지역사회의 ‘동행’에 대해, 전문가들은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지역사회의 변화는 물론이려니와, 학생들에게 지역사회 주체로서의 책임을 일깨우는 교육적 성과도 함께 거둘 수 있어서다. 지역기반 시민정치 교육을 오랫동안 진행해온 김의영 서울대 교수는 “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부 중심의 산학협력 모델에서 벗어나, 대학이 자리잡은 지역과 밀착된 현장 기반의 연구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특히 “대학의 특성과 지역의 수요를 반영한 교육을 할 수 있을 때, 대학이 사회혁신 주체로서 지역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대학과 지역사회가 한걸음 더 가까워질 것을 주문했다.
■ 8개 대학에 사회혁신 학위과정 지원
이런 가운데, 기업들도 대학과 지역사회의 협력에 다리 노릇을 자임하고 나서는 분위기다. 에스케이(SK)행복나눔재단은 지난해부터 대학 교수 및 연구자들의 사회혁신 연구와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지원하는 ‘사회혁신 교육자 네트워크’(ENSI·Educators’ Network for Social Innovation)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의 사회혁신 생태계 조성을 위해 전국 8개 대학의 학부 과정부터 박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사회혁신 학위 과정을 지원하고, 해당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또 지역 현장에 적용 가능한 사회혁신 연구와 인재 교육 모델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중이다. 올해 연구 주제는 ‘사회혁신과 인재양성’으로 모두 8편의 연구를 지원했다. 그중 연구가 끝난 논문 3편은 콘퍼런스를 통해 대학 교수, 연구자, 학생들과 공유하도록 했다. 행복나눔재단은 지난 20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삼익홀에서 ‘제2회 사회혁신교육자네트워크(ENSI) 콘퍼런스’를 열어 사회혁신 교육의 집합적임팩트(Collective Impact)를 주제로 대학?기업?지역사회의 사회혁신 교육 안착을 위한 협력의 필요성과 구체적인 사례를 나누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서 토론에 참여한 전혜숙 이화여대 기후환경변화예측연구센터 박사는 사회문제 해결 방안과 관련해 대학과 지역사회의 인식과 접근법은 서로 다르다고 지적한 뒤, 두 조직의 소통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경희 연세대 공학교육혁신센터 교수도 “대학이 사회혁신 교육과정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사람과 재원이 필수적”이라며 “지자체, 기업과의 협력을 통한 자원 조달도 중요하지만, 대학 자체로도 재원을 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이 사회혁신교육 분야에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날 기조연설을 한 영국 글로벌 네트워킹 기관 ‘식스’의 줄리 멍크 총괄매니저도 “사회혁신도 교육과 마찬가지로 오랜 투자와 노력이 필요한 분야”라며 “이 둘을 합친 개념인 사회혁신교육에 대해 무엇보다도 대학, 기업, 지역사회가 장기적인 투자 마인드로 접근해야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은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원 ek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