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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변하겠다는 재벌들, 내심 ‘시간아 가라’

등록 2017-11-01 07:35수정 2017-11-02 10:30

기자가 현장에서 지켜본 촛불 1년 - ② 재벌

황제경영·일감몰아주기 등 여전
정부 “스스로 변화하길” 호소에도
“변화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
재벌들 개혁동력 소진만 기다려

2일 공정위원장-5대그룹 간담회 분수령
“촛불집회에 직접 나가본 적 있느냐. 국민이 가장 크게 외치는 게 ‘박근혜 퇴진’이고, 그다음이 ‘재벌도 공범’이다.”(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저 자신 부족한 게 너무 많고, 삼성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고 반성한다.”(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2016년 12월7일 국회 국정농단 청문회장. 10월29일 서울 광화문에서 “이게 나라냐”는 구호로 시작한 촛불집회의 분노는 삼성·현대차·에스케이·엘지·롯데 등 9개 그룹 회장들을 국회로 불러냈다. 비선실세 최순실씨 모녀에 대한 불법 지원과 케이스포츠·미르 재단 출연 등 정경유착에 대한 의원들의 질책이 쏟아졌다. 일감몰아주기 등 편법 상속증여, 그룹 컨트롤타워 조직의 불법행위, 상습 담합행위 등 재벌의 각종 적폐와 특권, 반칙에 대한 청산 요구도 이어졌다. 그때마다 총수들은 “죄송하다”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

촛불 이후 재벌을 둘러싼 환경은 급변했다. 부패한 권력이 무너지고 적폐청산과 개혁을 전면에 내건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재벌 중심 성장에서 벗어나 포용적 성장을 대안으로 내놨고, 강력한 재벌개혁을 국정과제로 약속했다. ‘경제검찰’ 공정거래위원회의 책임자로 ‘재벌개혁 전도사’로 불리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임명했다. 김 위원장은 기업의 불법행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을 강조했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자본권력의 상징과도 같았던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이 뇌물사건으로 징역 5년의 실형선고를 받자 재벌은 충격에 빠졌다.

“오랜 관행이라 할지라도 국민과 시장의 시각에서 볼 때 문제가 없는지 다시 한번 검토한다.” 20대 그룹의 임원은 촛불 이후 기업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로 인식의 전환을 꼽았다. 엘지그룹의 임원도 “의사결정을 할 때 한번 더 생각하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관행처럼 여겨지던 편법 경영승계가 더이상은 불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화그룹 임원은 “(삼성으로 인해) 예방주사를 세게 맞았다. 사회 흐름이 바뀌지 않는 한 그런 행동을 되풀이할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일부 재벌은 행동으로 보여줬다. 롯데는 올해 10월12일 지주회사 전환을 통해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였다. 또 후진적인 계열사 간 순환출자 고리를 13개로 대폭 줄였다. 30대 그룹인 효성도 3세인 조현준 회장의 대표이사 취임을 계기로 투명경영 강화, 사외이사 독립성 확보 등을 담은 지배구조 개선안을 발표했다. 삼성도 2월말 미래전략실 해체, 계열사 자율 독립경영 등의 경영쇄신안을 내놨다.

인식의 전환은 변화를 향한 중요한 신호다. 하지만 기업문화와 시스템 혁신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재벌은 아직 없다. 지배구조 개선을 발표한 그룹도 내용이 미흡하거나, 여론 무마용 성격이 짙다는 평이다. 공정위 간부는 “롯데의 지주회사 전환은 2015년 경영권 분쟁의 개선책으로 나온 것인데, 롯데 사태의 본질인 이른바 ‘황제경영’은 달라진 게 없지 않냐”고 지적했다.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기소 직후에, 효성은 공정위의 계열사 부당지원 조사 마무리 시점에 각각 개선안이 나왔다.

일부 재벌의 행태는 과거와 다름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제개혁연대는 에스케이㈜가 에스케이실트론을 인수할 때 최태원 회장이 지분 29%를 함께 산 것과 관련해 ‘회사기회유용’ 의혹을 제기했다. 권오현 부회장 등 삼성전자 부문장 교체도 총수가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황제경영’ 사례로 꼽힌다. 권 부회장은 후진을 위한 용퇴라고 밝혔지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계열사 간부는 “삼성에서는 총수가 나가라고 안 했는데 스스로 그만두면 큰 불충”이라며 “이 부회장이 (실형으로 인한) 경영공백 장기화에 대비해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부친(이건희 회장)이 임명한 경영진을 대거 물갈이하려는 포석”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삼성이 약속한 자율적 독립경영 취지에 배치된다. 경제개혁연대는 오히려 실형을 선고받은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 등기이사직 사퇴를 요구한다. 삼성 사장단 인사를 해체된 미래전략실 출신 전직 임원이 주도한다는 얘기도 논란거리다. 삼성은 2008년 비자금 의혹 사건 때도 전략기획실 해체를 발표했으나, 간판만 내린 채 그대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

“기업이 잘돼야 경제가 잘됩니다. 국민 경제를 위하여, 더불어 잘사는 경제를 위하여….” 7월27일 청와대 상춘재 앞뜰. 문재인 대통령은 14개 그룹의 총수들과 파격적인 호프미팅을 하고 건배사를 외쳤다. “술이 살짝 오를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총수들도 만족감을 나타냈다. 대통령은 상생협력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 정부 정책에 협조를 당부했고, 재벌도 화답했다. 하지만 재벌이 내놓은 ‘선물 보따리’는 실망스러웠다. 삼성·현대차·에스케이·엘지 등 7개 그룹이 발표한 상생대책의 연간 실제 지원액은 최대 1241억원으로, 그룹당 177억원에 불과했다. 에스케이·롯데·한화·두산·씨제이 등 5개 그룹이 발표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규모도 1만2841명(올해 기준)으로, 이들 그룹에서 일하는 전체 비정규직의 7.3% 수준에 그친다.

“모든 변화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재벌은 항변한다. 하지만 경제단체의 대표 격인 대한상의조차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박용만 상의 회장은 지난 7월 제주 하계포럼에서 기업의 ‘솔선수범’을 강조해 경제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결국 무위로 끝나는 분위기다. 상의는 “기업과 국민의 눈높이에 차이가 큰 것 같다”고 답답해했다.

“재벌개혁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명박 대통령을 제외한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대통령은 모두 이런 약속을 했다. 하지만 20년간 개혁은 모두 실패했거나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권 출범 초기에는 강력히 개혁 의지를 천명했으나, 얼마 못 가서 후퇴하거나 흐지부지됐다. 새 정부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 “여소야대라는 현 국회 구조하에서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재벌개혁 법안이 통과되기는 힘든 것 아니냐.” 20대 그룹의 고위 임원은 새 정부의 개혁 동력이 떨어질 때까지 ‘시간끌기’를 하는 재벌의 속내를 은근히 내비쳤다.

이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참여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새 정부는 노무현 정부를 교훈 삼아 개혁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며 재벌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했다. 4대 그룹의 한 전직 사장은 “아직은 재벌이 오너의 지시를 지상명령으로 여기는 오너 중심 사고에서 못 벗어나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개혁정책이 2~3년만 지속되면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새 정부는 재벌개혁 전략으로 강온 양면 작전을 구사하고 있다. 김 공정위원장은 6월말 4대 그룹과의 간담회에서 “재벌개혁을 몰아치기식으로 하지 않을 테니, 기업 스스로 사회와 시장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선제적인 변화의 노력을 기울여달라”고 당부했다. 반면 9월 언론 인터뷰에서는 “4대 그룹이 12월까지 긍정적 변화의 모습이나 개혁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구조적 처방’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독기를 품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재벌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11월2일로 예정된 김상조 위원장과 삼성·현대차·에스케이·엘지·롯데 등 5대 그룹의 간담회가 문재인 정부의 재벌개혁 성패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김 위원장이 자율개혁을 외면하는 재벌에 어떤 대응 카드를 내놓을지 모두 주시하고 있다. 김우찬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재벌의 자율적 변화가 바람직하지만 쉽지 않다”며 “자율개혁이 어렵다면 새 정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장 강력한 ‘칼’은 총수 일가에 대한 일감몰아주기 조사다. 공정위는 자산 5조원 이상 재벌 45곳을 대상으로 한 실태 점검에서 두 자릿수 이상의 잠재적인 조사 대상을 적발했다. 하지만 그동안 중하위 그룹인 하림과 대림 등 2곳만 조사에 착수하고 자제해왔다.

재벌개혁이 성공하려면 엄정한 법 집행과 함께 법제도 개혁이 병행돼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 재벌 총수 일가 전횡 방지와 소유지배구조 개선 등을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또 소수 주주권 강화를 위한 상법 개정, 총수 일가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 확대, 신규 순환출자 해소 등을 세부 과제로 약속했다. 하지만 6개월 동안 성사된 것은 없다. 김남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부회장은 “상법 개정의 경우 5월 대선 때 여야 합의가 어느 정도 이뤄졌는데도 법무부가 최근에야 검토 태스크포스를 만든 것은 너무 안이하다”고 지적했다. 촛불시위를 주도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도 지난 23일 기자회견에서 올해 2월 발표한 100대 촛불 개혁과제 중 10대 재벌개혁 과제에서 지난 9개월 동안 실제 이뤄진 것은 ‘이재용 구속’ 하나뿐이라고 발표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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