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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재벌 개혁, 시대의 요구인데…‘가족승계’ 욕망 여전

등록 2017-09-14 21:11수정 2017-09-14 21:57

이재용 실형·문재인 정부 압박에도
삼성은 ‘옥중경영’…다른 곳도 눈치만

전문가들 ‘소유·경영분리’ 제안
“재벌개혁 못하면 경제위기 올수도
촛불로 탄생한 정부, 더 적극 나서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달 1심에서 징역 5년형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국내 대표 재벌 삼성의 총수 일가가 실형을 선고받은 것은 이 부회장이 처음이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는 “촛불 시민들이 적폐 청산을 요구하면서 적폐 근원에 정경유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아니었다면 이 부회장이 실형을 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실형은 한국 재벌이 정경유착 근절과 근본적 지배구조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도 ‘촛불혁명’의 대의에 따라 재벌개혁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학자일 때부터 소문난 ‘재벌 개혁론자’였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취임 뒤 재벌이 올해 말까지 스스로 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직접 메스를 들이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한국 재벌은 변곡점에 놓였다. 창업주와 그 뒤를 잇는 재벌 2세는 한국전쟁 전후부터 1990년대 급성장기를 거치며 영향력을 키워왔다. 하지만 이제 3∼4세대로 내려오면서,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했다. 새 정부도 상법을 고쳐 사외이사와 감사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공정거래법을 개정해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강화하는 등 재벌 개혁에 나서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재벌이 특별히 변화하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삼성은 여전히 이 부회장의 ‘옥중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 계열사의 한 임원은 “주요 계열사 사장이나 옛 미래전략실 임원들이 자주 면회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재벌도 대기업집단 내부거래 전수조사 등 공정위 행보를 지켜보는 등 눈치를 보면서 변화의 움직임은 드러내지 않고 있다. 10대 그룹의 한 임원은 “현재 지배구조를 변화시킬 다른 요인이 없는 상태인데, 정부가 지주사 설립 요건 강화 등을 어떻게 추진할지 지켜보는 상태다”라고 했다.

특히 재벌의 ‘가족 승계’ 욕망은 여전히 꺾일 줄 모른다.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 2~3세로 넘어가면서 전문경영인 체제가 주류로 자리잡았지만, 우리나라 재벌의 총수 일가는 ‘회사는 내 것이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일각에선 ‘오너경영’이 빠른 결정과 통 큰 투자 등으로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으로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체제를 유지하는 데 따른 대가도 크다. 현행 상속증여세법을 따르면 합법적인 가업 승계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를 우회해 소유·경영권을 승계하고자 각종 편법·불법이 동원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인 일감 몰아주기는 중견·중소기업의 성장을 가로막음으로써 우리 경제의 혁신능력을 갉아먹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가족 승계를 고집하는 한 이재용 부회장처럼 법의 심판을 받거나, 롯데그룹 ‘형제의 난’과 같은 일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롯데 신동빈 회장이나 두산 박정원 회장 등을 빼면, 여전히 지분을 승계하지 않은 재벌 3·4세가 많다. 현대차 정의선 부회장은 사실상 후계자 역할을 하지만, 아직 지분은 승계받지 못했다. 또 엘지(LG)의 구광모 상무와 한화의 김동관 전무, 현대중공업의 정기선 전무 등도 후계자로 인정받지만 비슷한 처지다. 에스케이나 씨제이 등은 아직 자녀들이 어려 지분은 물론 직위 승계가 멀었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원은 “무리수를 둘 위험이 있는 대표적인 곳은 한화, 한진, 현대중공업 등이다”라고 말한다.

재벌들은 과거에 일단 ‘소나기’만 피해보자는 식의 행태를 보인 바 있다. 경제개혁연대가 올해 초 현대차·두산·에스케이 등 재벌들이 과거 불법 행위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뒤 내놓은 지배구조 개선안 등을 분석한 결과, “진정한 지배구조 개선보다 여론 무마나 지배주주 사면 등 국면 전환을 위해 추진한 것이라는 의심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재벌 개혁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박상인 교수는 “문재인 정부는 촛불시민의 힘으로 집권에 성공했다. 지금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며 “재벌 개혁을 하지 않으면 재벌의 누적된 부실로 인해 경제위기가 올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센터장도 “수많은 경쟁에 노출된 외국 시장에선 기업이 피붙이한테만 경영권을 승계하면 회사가 금방 파탄이 나고 주주들이 당장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견뎌낼 수 없다”며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대안으로 장세진 카이스트 교수(경영대학원)는 재벌의 소유·경영 분리를 제안한다. 장 교수는 “대주주 일가가 생각을 바꾸면, 스웨덴 발렌베리나 인도 타타처럼 주식을 신탁한 공익법인 등을 통해 기업을 소유하면서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초콜릿과 애완동물 사료를 만드는 세계 최대 식품기업 가운데 하나인 마즈(MARS)도 1911년 창업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가면서 이를 실현하고 있다. 김종복 한국마즈 상무는 “4대째인 창업자 후손들은 이사회를 구성해 인수합병 등을 결정하고, 주로 전세계를 누비며 직원들에게 회사의 비전과 철학을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경영은 회사 내부 승계 프로그램을 거쳐 올라온 전문경영인이 최고경영자가 돼 맡는다”고 말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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