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변하고 있다. 기술변화, 세계화, 인구변화 등으로 일 자리, 일하는 방식, 고용구조가 바뀌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로봇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기술 발달이 가세해 일에 본질적인 변화까지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임금노동-정규직-전일제 노동자를 전제로 설계된 기존의 분배, 재분배(복지), 노동법 체제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변화를 거부하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행복한 미래를 스스로 설계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해 어떤 일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고 ‘좋은 노동’ 인지를 논의하고, 변화 방향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가야한다. 그 일은 여고용이 안정되고, 생활임금 이상이 지급되며, 가정 및 개인발전과 양립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독일은 ‘아르바이트 4.0’으로 이런 논의를 벌써 시작했다.
한국형 ‘노동(아르바이트) 4.0’ 대화를 시작하자① 에서 이어짐.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07934.html
로봇은 빠른 속도로 인간노동을 대체하고 있다. 기아차 슬로바키아 공장에 설치된 산업형 로봇. AP연합 (※ 그래픽을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분배(복지): 패러다임이 달라진다
우버 운전자는 노동자인가 자영업자인가? 영국 런던 중앙노동법원은 지난해 10월 2명의 운전자가 우버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들은 우버의 피용인 신분이다. 따라서 유급 휴가와 병가, 최저 임금을 보장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결했다. 우버 소속 운전자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것이다. 우버는 항소했는데 운전자들을 개인 사업자라고 주장하며 근로자성을 부인해 온 논리를 굽히지 않고 있다.
종업원을 채용하지 않고 제삼자에게 위탁하는 노동이 늘어나면서 노동 관련법이 사회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영역이 늘어나고 있다. 디지털 ‘프레카리아트’라 불리는 플랫폼 노동자는 모호한 정체성만큼 법적인 보호의 사각지대에 있다. 이들은 노동법 적용대상자가 아니어서 최저 임금, 해고보호, 단체협약에서 제외된다. 저소득계층인데도 보호를 더 못 받는 것이다.
노동은 소득과 복지의 원천이었지만 점차 이런 관계가 어긋나고 있다. 현재의 노동 관련 제도와 복지는 임금노동을 전제로, 그것도 정규직 기반의 산업시대를 기반으로 설계된 것이다. 새로운 변화에 맞게 플랫폼 노동자와 같은 1인 자영업자들도 산재, 실업보험 등 사회보험에 통합하는 등 노동법과 사회보장제도의 변화가 모색되고 있다.
아울러 갈수록 노동과 소득의 연계가 약해지는 사회에서 구성원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분배제도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기본소득 지급은 현재 진행되는 기술주도의 사회변화와 관련해서 활발히 논의되는 분배의 패러다임이다. 자산이나 능력, 고용 여부에 관계없이 일정 금액을 국가가 국민에게 일괄적으로 지급하는 제도이다. 최근 서울시와 성남시에서 지급하는 청년수당도 기본소득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쟁점은 재원마련인데 <파이낸셜타임즈>의 최근 칼럼은 이용자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빅데이터가 곧 돈이므로, 이를 무상으로 활용하는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디지털 기업이 기본소득의 재원을 내야 한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기업의 산출에 로봇과 인공지능이 기여하는 비율을 따져 ‘로봇세’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유럽에서 나온다. 기본소득은 해결할 난점이 많지만 영화 <나 다니엘 브레이크>에서 묘사한 것 같은 복지행정의 관료성과 비효율성을 줄일 수 있다. 알레스카등 일부 지역의 실험에서는 수혜자가 자존감을 유지하며 무엇보다 중산층까지 수혜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사회를 안정화하는 장점이 있다.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 강남훈 이사장 (한신대 교수)은 지난주 국회에서 열린 ‘일자리 변화와 기본소득 도입방향’ 세미나에서 “시간문제일 뿐 반드시 도입될 제도”라고 말했다.
혁신(생산성): 노동자도 기업도 ‘좋은 일’이어야 한다
일의 변화는 기업에도 새로운 과제를 준다. 생산성을 높이고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직무와 노동조건을 어떻게 설계할지, 기계와 인간을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숙제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시대에는 유연하고 탄력적인 조직문화를 가진 기업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최근 고용노동부는 노동자에게 근무시간의 유연성을 부여하는 시간선택제 도입으로 성과를 거둔 30개 기업의 우수사례집을 내놨다. 시간선택제 도입 이후 노동자들이 일과 가정의 양립을 이룰 수 있었고, 근무 만족도가 상승했으며 이직률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이는 곧 기업의 성과향상으로 이어져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됐다는 게 이 사례집의 요지이다.
실재 직원이 만족하는 ‘좋은 일’은 혁신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이 일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는 있지만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혁신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축적의 시간>(공저)이나 <축적의 길>(이상 지식노마드) 같은 책을 통해 한국 산업의 혁신 방안을 체계화한 이정동 교수 (서울대)는 “혁신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 아이디어를 스케일업(실용화) 하는 사람의 몸에 체화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몰입노동이 혁신의 원천이라는 얘기다.
실제 만족하고 존중받는 노동자가 혁신을 이룬 사례는 많다. 생활용품 업체 유한킴벌리는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감원을 하지 않고 일을 나누는 방식으로 4조3교대제를 채택했다. 충분한 휴식과 교육을 통해 생산성을 높였다. 그 결과, 기저귀와 생리대 시장에서 바닥으로 향하던 시장점유율을 뒤집으며 2000년대 초 이 분야 1위 이던 P&G를 누르게 된다. 뉴 패러다임 경영으로 불리는 이 방식도 노동자의 만족과 역량향상에 기초하고 있다. 박지순 교수(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는 앞의 국회 토론회에서 “양질의 근로조건은 기업의 혁신능력과 경쟁력을 위한 중요한 요소”라며 “노동법이 혁신과 경쟁력을 위한 인프라가 돼야 한다”고 밝혔다.
‘좋은 일’에 대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일의 질을 개선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른바 ‘헬조선’을 벗어나고, 산업의 경쟁력도 높이는 전략이 될 수 있다. 출퇴근 시간을 노동자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유연근무제를 채택하는 것만으로도 장시간 노동 관행을 벗어나고, 일과 생활의 균형을 이룰 수 있으며, 여성 전문인력의 경력단절을 줄이며 출산율을 높이는 등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지능정보기술이 사회를 아무리 변화시켜도 우리가 원하는 일은 최소한 직장과 가정의 양립이 가능한 일이 되어야 할 것다. 그간 유연성이 기업 쪽에서 ‘해고의 자유’를 뜻했다면, 개인이 자기발전, 가족과 일의 양립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자기 주도적 시공간 운영하는 유연성, 안정성과 함께 가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회사 경영이 악화돼 해고되더라도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재기를 모색할 수 있도록 나라의 복지제도 역시 보강해야 한다. 기술변화를 두려움으로 여겨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혁신적이고 효율적이며 고객지향적인 생산과 서비스의 원천”이라는 공감 아래 노사정이 디지털사회의 ‘좋은 일’을 찾기에 머리를 맞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이런 ‘좋은 일’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가고 이를 정부와 기업의 정책과 과제로 삼는 노력은 아직 부족하다. 민간연구소인 희망제작소는 2015년부터 ‘좋은 일, 공정한 노동’이란 프로젝트를 통해 ‘좋은 일’의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다. 일의 6가지 측면(고용안정, 직무· 직업특성, 개인의 발전,임금, 근로조건, 관계)에서 ‘좋은 일’의 기준을 생각해 보도록 했다. 인터뷰와 설문조사 등을 통해 그동안 수렴된 좋은 일의 이상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년이 보장되며, 주 40시간 이하의 노동시간을 지키고, 나의 적성에 맞거나 재미있으며, 일하는 사람 간에 화합할 수 있는 환경과 문화가 갖춰져 있고, 일하는 과정에서 전문성과 숙련도가 증진되며, 그에 따라 임금도 상승하는 일”
특히한 것은 설문조사에서 임금(12%)이나 고용안정(16%)보다 근로조건(48%)을 ‘좋은 일’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꼽은 응답자가 많은 것이다. 근로조건은 △근로시간 △개인 삶 존중 △스트레스 강도 등의 측면을 말한다. 특히, 20~30대는 ‘업무가 재미있는 일’, ‘업무와 조직에서 배울 것이 있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좋은 일의 가장 중요한 조건 자료: 희망제작소 (※ 그래픽을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근로조건 측면에서 본 좋은 일의 조건 자료:희망제작소 (※ 그래픽을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황세원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은 “이제는 정규직,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누구나 생활 가능한 임금, 고용 안정성, 안전, 어느 정도의 기회균등을 보장받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라며 “그것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보다 실질적으로, 현실적으로 일자리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스마트공장을 중심으로 한 인더스트리(산업) 4.0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아르바이트(노동) 4.0’의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인더스트리 4.0이 요구하는 유연한 노동환경에 대비해 노동권의 후퇴를 방지, 실업 예방 등 광범위한 이슈를 다루는 노사정 교섭체제를 마련한 것이다. 여기서 제시된 노동개혁과제의 주된 내용은 △개인의 취업 가능성을 높이는 교육체제를 어떻게 만들지 △유연하면서 자기 주도적인 근로시간 △온디멘드(On-demand) 서비스와 같은 새로운 부문의 근로조건 개선 △인간과 기계의 협업을 고려한 산업안전 △빅데이터 시대에 살아가는 근로자의 개인정보 보호 기준 강화 △종업원 대표의 경영 결정에 참여하는 직장 민주화 △ 자영업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 증진 △복지국가의 재정확보 등이다. 주목할 것은 이들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독일 연방 노동사회부가 사회적 논의의 필요성을 담은 <녹서>를 발간한 뒤 이를 지방정부, 시민단체, 노동계, 재계에 돌려 1년 이상 지속적인 토론을 유도했다. 시민들에게 <녹서>의 핵심 내용을 친근하게 전달하기 위해 <미래(Future)> 라는 영화 시리즈를 만들어 전국 18곳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에게 던진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디지털화하는 사회적 변동 속에서 ‘좋은 노동’이라는 이상은 어떻게 유지, 강화될 수 있을까?”
좋은 일에 관해 사회 구성원이 대화에 참여하고, 투명하게 정보에 접근하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 이 과정이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도 그런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끝)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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