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 선제적 의제 던지고 주도
‘비폭력만 정당’ 생각은 경계해야
‘비폭력만 정당’ 생각은 경계해야
2016 촛불집회 초기 광장에선 비폭력 시위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처음으로 100만명이 모인 지난 11월12일 3차 촛불집회 때 논쟁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날 사상 처음으로 행진이 가능해진 경복궁역 앞 내자교차로에서 몸싸움이 벌어졌고, 차벽을 넘어간 시민 23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시민들은 참가자와 경찰이 몸싸움을 벌이려 할 때마다 “비폭력”을 외쳤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은 다음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백만명이 모종의 강력한 자기억압 상태에 있다”며 “경찰이 권고하는 시위 태도를 벗어나면 ‘프락치'라는 비난이 오가는 순치된 시위는 오히려 ‘백만명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위협'을 구현해낸 게 아닐까”라고 썼다.
그다음 주인 19일 집회에선 이강훈 작가가 나눠준 3만장의 꽃 스티커를 시민들이 경찰 차벽에 붙이는 과정에서도 논쟁이 있었다. 일부 시민들이 “우리가 안 떼면 의경이 고생한다”면서 스티커를 떼자, 다른 시민들은 “의사 표현을 왜 가로막냐”며 항의하기도 했다.
참가자가 150만, 200만으로 점점 늘어난 이후 비폭력 집회로 방향은 정리됐다. 이후 시민들은 경찰과 충돌하지 않았고, 연행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비평가들은 두 가지로 이유를 짚는다. 먼저 조직된 무력집회가 이뤄지기엔 군중의 규모가 너무 컸다는 것이다. 이승한 칼럼니스트는 “무력 행동을 하려면 이를 계획하고 결행할 특정 집단이 필요한데,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규모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말했다.
두번째는 경찰이 폭력 진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정훈 수유너머엔 연구원은 “80년대에도 폭력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수는 평화시위를 하자고 했다. 경찰이 폭력 진압을 하니 시위대도 대응 폭력을 사용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도 대통령의 잘못이 커 민주적 절차에 따라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권의 잘못이 드러난 이번 사건의 성격상 경찰도 과잉 진압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비폭력을 모든 집회와 시위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잣대로 세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승한 칼럼니스트는 “집회 시위 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한 무력 행동을 현행법 위반으로만 보는 것은, 더 큰 파열음을 내는 수단이 아니고선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폭력-비폭력 논쟁을 넘어 2016년의 촛불이 진화했다는 데 있다. 시민들은 사태를 주도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초반, 정치인들은 거국중립내각 구성 등으로 갑론을박했고, 역풍을 우려해 섣불리 퇴진 요구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명확하게 퇴진을 요구했고, 정치인들도 결국 시민들의 뒤를 따라왔다. 국회에서 탄핵을 가결하는 데도, 232만 촛불이란 숫자의 힘이 견인차가 됐다. 정 연구원은 “광장의 경험을 축적해온 시민들이 이번 촛불시위에서 선제적으로 의제를 던지고 국면을 뚫어냈다. 광장은 진화했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쏟아낸 풍자와 해학은 벽을 허물고 저변을 넓혔다. ‘장수풍뎅이 연구회’ ‘민주묘총’ ‘고산병 연구회’ 등 전에 볼 수 없던 재미있는 깃발과 “이러려고 대통령 됐나 자괴감 들어” 등 온라인에서 끝없이 생산된 풍자 글과 사진들은 집회를 즐거운 축제로 끌어올렸다.
시민단체와 시민 간의 괴리도 좁혀졌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에는 “깃발 내려”란 구호가 등장할 정도로 기존 운동권이나 단체들에 대한 불만이 넓게 퍼져 있었다. 하지만 2016년엔 16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을 만들어 촛불집회를 운영하면서 디제이디오시의 ‘여혐’ 논란과 집회 방식 등에서 시민들의 요구에 민첩하게 반응하며 시위를 원만하게 운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퇴진행동에 지난 16일까지 모두 10억6천만원가량의 시민 기부금이 모였다는 것이 그 증거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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