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대선 후보는 ‘복지 대통령’을 표방하면서도 증세 논의엔 주춤한다. 그나마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만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지난해 12월31일 국회 본회의에서 고소득자의 세금 부담을 소폭 늘리는 내용을 담은 소득세법 개정안이 가결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줌인] 대선 후보들, 돈 많이 드는 복지 공약 쏟아내지만 재원 조달 종합 대책은 안 보여…“다음 정권에서 복지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
공약은 공짜다. 그러나 정책엔 돈이 든다. 그 커다란 간극을 메우는 게 대통령 후보자의 강력한 공약 실천 의지다. 선거 교본대로라면 후보자들은 현실적인 재원 대책으로 유권자에게 공약 실천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이번처럼 돈이 많이 드는 복지 공약을 전면에 내세우는 후보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현재까진 유권자가 각 후보자들의 진정성을 따져볼 최소한의 기준도 없는 상황이다.
선관위는 재원 조달 명시해놓았는데
대선을 40일 앞둔 11월9일까지 자신들이 발표한 모든 공약을 실현하는 데 들어가는 총재원을 밝힌 캠프는 한 곳도 없다. 하다못해 재원을 어떤 식으로 조달할지에 대한 확실한 원칙을 제시한 캠프도 없다. 대선 후보들의 10대 주요 공약을 소개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에는 부문별 공약에 재원 조달 방안을 함께 명시하도록 돼 있지만 하나같이 주먹구구다.
복지 공약만 보더라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쪽은 “매우 포괄적인 공약이므로 추후 세부적인 공약들을 발표하며 함께 발표할 예정”이라고만 돼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쪽(“재정·복지·조세 개혁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겠다”)과 무소속 안철수 후보 쪽(“예산 자연증가분을 우선 쓰되, 지출 구조 개편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겠다”)도 불친절하기는 마찬가지다. 현재로선 유권자가 각 캠프의 공약 비용과 재원 조달 방식이 궁금하다면 지난 4·11 총선 때 각 당이 내놓은 공약집을 뒤져보는 수밖에 없다. 물론 당시엔 새누리당이 총선 공약 재원을 75조원, 민주당은 160조원으로 밝혔지만 대선 공약에 들어가는 돈은 그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총선 이후 각 당의 후보와 안 후보가 서로 경쟁하듯 새로운 공약을 쏟아낸 탓이다.
세 캠프는 재원 추계와 조달 방법이 실종된 이유에 대해 “대선 공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모든 분야의 공약이 나와야 총비용을 추정할 수 있고, 그에 맞는 조달 방안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대선 투표일이 코앞인데도 후보들은 매일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상대 후보들의 정책을 보며 공약 수위를 조절하는 ‘눈치보기’가 막판까지 이뤄지는 탓이다. 공약 발표 속도가 가장 늦은 박 후보 쪽은 이르면 이달 중순에야 각 분야 공약을 정리한 최종 공약집을 내놓겠다는 태도다. 후보 등록일(11월25~26일) 이전에 단일화를 하기로 한 안 후보와 문 후보는 공약집을 11월10~11일에 내놓기로 했다.
민주당의 복지국가위원회에 참여하는 핵심 관계자는 “복지정책에서 계속 넣고 빼고 할 게 생기고 있다. 정확한 (재정 추계) 작업은 아직 못하고 있다. 최종 공약집에는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각 캠프의 늑장 발표로 이번 대선에서도 유권자는 투표까지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각 캠프의 수백 개 공약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 재원 조달이 합리적인지를 일일이 따져봐야 하는 셈이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도 투표 20~30일 전에야 최종 공약집을 내놨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처장은 이렇게 지적했다. “지난 10월9일 각 캠프에 전체 공약과 재원 추계 등을 알려달라고 공개 질의서를 보냈는데 아직 답이 없다. 각 당에서 답변이 와야 상호 검증을 시키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덧붙여 유권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데 시간이 없다. 결국 제대로 검증받지 않고 끝까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것이다.”
근본 ‘구조조정’ 대신 ‘부분 손질’만
각 캠프가 앞으로 재원 조달 방식을 발표하더라도 비현실적인 대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세 후보 모두 ‘복지 대통령’을 표방하면서도 세입과 세출을 동시에 손보는 ‘근본적 구조조정’ 대신 세입은 최소화하되 세출만 바꾸는 ‘부분 손질’을 이야기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엔 세금을 올리겠다고 하면 당장 조세 저항이 나타나 표를 깎아먹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실제 <경향신문>이 지난 10월5일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44.3%는 “복지 확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는 “세 후보 모두 복지국가를 이야기하며 유권자의 눈치를 보고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올리겠다는 말은 절대 안 한다”고 지적했다. 재정건전성을 흔들지 않고 복지를 확대하려면 증세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인데도 후보자들은 증세 논의를 비껴가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복지와 증세에 대해 가장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캠프는 박 후보 쪽이다. 박 후보는 “세금을 무조건 걷어서 (복지) 하겠다는 것은 무책임하다”며 여전히 ‘60 대 40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전체 재원의 40%는 비과세 감면·축소로 해결하고 나머지는 대주주배당세나 주식양도차익 과세 확대 등을 통해 조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캠프 안에서도 증세 여부를 두고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지난 10월16일 “(현행 19%인) 조세부담률이 21% 수준까지 가면 (연간 세수 증가는) 30조원 가까이 된다”며 증세의 필요성을 주장했다가 하루 만에 철회하기도 했다.
반면 문 후보 쪽은 부자·대기업 증세로 요약된다. MB 정부의 법인세·소득세 감세를 철회하고 종합부동산세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조세부담률을 단계적으로 MB 정부 이전인 21% 정도까지 올리는 것만 목표로 잡고 있다. 복지 관련 시민단체들의 요구대로 조세부담률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5%)까지 올리려면 전반적인 증세가 필요하지만 그는 “추가적인 증세는 없다”고 선을 긋는다.
안 후보 쪽은 유일하게 복지 수혜 계층과 조세의 부담 계층을 일치시키는 ‘보편 증세’를 내세운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안에서 아직까지는 다른 캠프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안 후보 쪽의 장하성 국민정책본부장은 10월2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세부담률을 MB 정부 초기 수준인 21%대로 회복시키면 25조원의 추가 세수가 생긴다”며 “여기에 불요불급한 사업에 투입된 재원 등으로 인한 자연 증가분 등을 더하면 추가적인 증세 없이도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안 후보 쪽은 오히려 자영업자 대책을 발표하며 세금 탈루의 부작용을 안고 있는 간이과세자 확대를 주장했다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로부터 “보편적 증세를 이야기하며 과세 기반을 훼손하는 공약을 내놨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문과 안, 조세부담률 21%로 올린다면서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는 세 후보자의 공약 실천 의지를 이렇게 평가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대통령이라면 유권자를 설득해나가야 하는데, 세 후보에겐 그런 개념이 없다. 다음 정권에서도 복지가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다.” 남은 기간에 대선 후보들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이번 선거도 유난히 화려했던 말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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