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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가족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야구
애정결핍 꼬꼬마는 어떻게 삼성팬이 되었나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야구
애정결핍 꼬꼬마는 어떻게 삼성팬이 되었나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우리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를 흉보던 그 모든 일들을 이제 내가 하고 있다 (넥스트- ‘아버지와 나’ 중)
2012년 프로야구는 삼성 라이온즈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최근의 삼성 라이온즈다운 야구였고, 2위와의 전력 격차가 드러나는 우승이었다. 맥주에 닭다리를 뜯으며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던 내게,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말을 건넸다. 전라도 출신 부모님에 인천 태생인 네가 왜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느냐는 이야기다. 연고지 위주 한국 프로야구 풍토에 비춰 신기할 법도 한 일이다.
내 야구의 시작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 1952년, 한국전쟁마저 비켜 간 지리산 서쪽 끄트머리에서 5남 3녀의 차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마치고부터 땔나무 모으기, 밭일하기 등 ‘집안 건사하기’ 미션을 떠안았다. 평생을 ‘허허’ 웃으며 살다 가신 할아버지와 병약하셨던 할머니를 대신해 장남과 차남에게 돌아간 몫이었다.
땅뙈기 한뼘 없는 고향을 지킬 이유가 없었던 아버지는, 형(큰아버지)과 함께 인천으로 상경했다. 인천 남동공단과 부평공단에 전라도·충청도 시골 청년들이 급격히 유입되던 1970년대 초반이었다. 고등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눈과 귀가 밝았던 아버지는 노동현장에 투신했던 대학생들에 계몽(?)되어 노동조합 활동에 나서다 뭇매를 맞고 해고되기 일쑤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결핵까지 찾아왔다. 젖먹이 아들까지 태어난 상황,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 결심한 아버지는 매형(큰고모부)의 권유에 따라 대형버스 면허를 따고 운전기사가 되셨다.
가사도우미 일을 했던 어머니와 월급쟁이 운전기사를 하던 아버지는 정말 성실하게 일하셨다. 아들내미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내 집 마련을 목표로 세운 두 분은,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셨다. 작은 연립주택을 구입해 1차 목표를 달성한 두 분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중고 버스를 구입해 월급쟁이 신세를 벗어나시더니, 중학생 때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고등학생 때는 평수를 늘리는 데 성공하셨다.
덕분에 내 유년의 기억은 온통 동생과 보낸 시간들뿐이다. 내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랜 기억이 두살 터울 여동생의 기저귀를 갈던 일이다. 그래서 난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미워했다. 여동생과 함께 그림책을 읽거나 인형놀이를 하는 게 지겨웠고, 그게 모두 일하느라 집을 비운 부모님 탓인 것으로 여겨졌다. 집에 돌아오면 늘 주무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아쉬웠다. 좀더 머리가 굵어서는 아버지의 비상한 머리를 운전기사 동료들의 배차 조정, 또는 바둑·카드 등 잡기에 이용하는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인지 “현웅이 네가 운동을 잘하니, 훤칠하니 잘생겼니, 우리 집안에 돈이 많니? 네가 나처럼 살지 않으려면 공부 말고는 답이 없다”던, 지금 생각하면 용기 내어 말씀하셨을 마음 아픈 독려도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가족 부양엔 충실했지만
무서웠던 유년시절의 아버지
그를 웃게 한 건 해태였다
해태에 늘 졌던 삼성 응원은
나의 반항이자 대리만족 어느덧 나이 서른이 됐다
내 안의 아버지를 발견하면서
피식 웃을 수 있는 지금,
삼성이 우승한 한국시리즈가
예전처럼 즐겁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감정적이고 순박한 어머니를 몰아붙이는 모습이 힘겨웠다. 특히 아버지는 당신이 옳다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감정적으로 대응할 때 큰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나와 동생은 겁에 질려 부둥켜안았다.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나였다. 부부싸움을 하던 아버지께 “자식 보기 부끄럽지 않으세요? 제발 그만 좀 하세요”라고 소리 질렀던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나는 아버지가 두려웠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셨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만은 남달랐지만, 대화에는 서툴렀다. 그런 아버지가 텔레비전 앞으로 날 끌어내던 때는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경기가 중계되던 때였다. 선동열의 쾌투와 김성한, 이순철의 적시타에 아버지는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웃음을 터뜨리시고는, 자랑스레 전라도 야구의 유구한 전통을 말씀하셨다. 모처럼 전라도 출신이라는 설움에서 해방된 카타르시스셨을 테다. 혹은 생활의 무게를 내려놓은 순수한 즐거움이셨을 테다. 그러나 나는 그 검붉은 유니폼이 싫었다.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애정결핍 ‘꼬꼬마’가 할 수 있는 반항이란, 그 해태 타이거즈에 늘상 깨지던 파란 유니폼을 속으로 응원하는 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 해태 타이거즈 막강 타선에 맞서 15회를 완투한 박충식을 보며 눈물까지 흘렸던 데는, 그런 대리만족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시간은 흐른다. 대학교 시절, 술에 약한 아버지와 나는 머그컵으로 아버지는 소주잔으로 대작을 한 뒤부터 나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거의 지웠다. 아버지는 이제 일을 줄이고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신다. 혼자 다니기 적적하신지, 귀찮다는 어머니를 조수석에 모시느라 애쓰신다.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여는 아마추어 사진 전시회 날짜를 알려주며 수줍어하기도 하신다. 많이 귀여워지셨다. 그사이 나도 한 여자의 남편이 됐고, 내 완고함 탓에 다투기도 한다. 그럴 땐 ‘아버지 닮아서 이런가’ 고통스럽다가도, 일과 내 주변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남다르게 발동하는 걸 보면, ‘천생 저 양반 아들 맞구나’ 하며 웃게 된다. 이렇게 나와 아버지가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조금은 더 나은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이 나이 먹어가는 거구나 싶다. 이제 다시 야구 이야기다. 마음속 아버지와 화해한 탓일까. 이제 나는 그저 오래된 습관처럼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한다. 2013년에는 기아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가 다시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이제 야구에 시들하신 아버지를 반드시 거실로 불러내야겠다. 맥주에 닭다리라도 뜯으며, 2002년 삼성이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던 극적인 순간을 설명해드릴 작정이다. 만약 삼성이 3년 연속 우승이라도 하게 되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거죠 뭐”라며 원년 해태 팬을 짐짓 골지를 거다. 이렇게 애정결핍 꼬꼬마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그래도 뭐, 괜찮다. 아버지와 함께 나눌 시간이 아직은 많이 남았으니까. 바둑을 배워볼까, 기타를 익혀서 아버지와 합주를 해볼까 싶기도 하다. 뭐가 됐건 아버지는 분명 좋아하실 거다. 내 책장에 말없이 바둑 교재를 꽂아놓은 분도, 생일 선물로 청하지도 않았던 기타와 하모니카를 사주셨던 분도 아버지셨으니까.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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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웠던 유년시절의 아버지
그를 웃게 한 건 해태였다
해태에 늘 졌던 삼성 응원은
나의 반항이자 대리만족 어느덧 나이 서른이 됐다
내 안의 아버지를 발견하면서
피식 웃을 수 있는 지금,
삼성이 우승한 한국시리즈가
예전처럼 즐겁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감정적이고 순박한 어머니를 몰아붙이는 모습이 힘겨웠다. 특히 아버지는 당신이 옳다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감정적으로 대응할 때 큰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나와 동생은 겁에 질려 부둥켜안았다.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나였다. 부부싸움을 하던 아버지께 “자식 보기 부끄럽지 않으세요? 제발 그만 좀 하세요”라고 소리 질렀던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나는 아버지가 두려웠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셨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만은 남달랐지만, 대화에는 서툴렀다. 그런 아버지가 텔레비전 앞으로 날 끌어내던 때는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경기가 중계되던 때였다. 선동열의 쾌투와 김성한, 이순철의 적시타에 아버지는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웃음을 터뜨리시고는, 자랑스레 전라도 야구의 유구한 전통을 말씀하셨다. 모처럼 전라도 출신이라는 설움에서 해방된 카타르시스셨을 테다. 혹은 생활의 무게를 내려놓은 순수한 즐거움이셨을 테다. 그러나 나는 그 검붉은 유니폼이 싫었다.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애정결핍 ‘꼬꼬마’가 할 수 있는 반항이란, 그 해태 타이거즈에 늘상 깨지던 파란 유니폼을 속으로 응원하는 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 해태 타이거즈 막강 타선에 맞서 15회를 완투한 박충식을 보며 눈물까지 흘렸던 데는, 그런 대리만족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시간은 흐른다. 대학교 시절, 술에 약한 아버지와 나는 머그컵으로 아버지는 소주잔으로 대작을 한 뒤부터 나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거의 지웠다. 아버지는 이제 일을 줄이고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신다. 혼자 다니기 적적하신지, 귀찮다는 어머니를 조수석에 모시느라 애쓰신다.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여는 아마추어 사진 전시회 날짜를 알려주며 수줍어하기도 하신다. 많이 귀여워지셨다. 그사이 나도 한 여자의 남편이 됐고, 내 완고함 탓에 다투기도 한다. 그럴 땐 ‘아버지 닮아서 이런가’ 고통스럽다가도, 일과 내 주변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남다르게 발동하는 걸 보면, ‘천생 저 양반 아들 맞구나’ 하며 웃게 된다. 이렇게 나와 아버지가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조금은 더 나은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이 나이 먹어가는 거구나 싶다. 이제 다시 야구 이야기다. 마음속 아버지와 화해한 탓일까. 이제 나는 그저 오래된 습관처럼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한다. 2013년에는 기아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가 다시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이제 야구에 시들하신 아버지를 반드시 거실로 불러내야겠다. 맥주에 닭다리라도 뜯으며, 2002년 삼성이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던 극적인 순간을 설명해드릴 작정이다. 만약 삼성이 3년 연속 우승이라도 하게 되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거죠 뭐”라며 원년 해태 팬을 짐짓 골지를 거다. 이렇게 애정결핍 꼬꼬마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그래도 뭐, 괜찮다. 아버지와 함께 나눌 시간이 아직은 많이 남았으니까. 바둑을 배워볼까, 기타를 익혀서 아버지와 합주를 해볼까 싶기도 하다. 뭐가 됐건 아버지는 분명 좋아하실 거다. 내 책장에 말없이 바둑 교재를 꽂아놓은 분도, 생일 선물로 청하지도 않았던 기타와 하모니카를 사주셨던 분도 아버지셨으니까.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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