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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미 중산층의 몰락 뒤엔 ‘지속적 부자감세’

등록 2011-12-08 20:23수정 2011-12-09 17:37

“월가는 이익 늘었다는데…”
부의 재분배 균형 깨지며
소득 양극화 점점 심해져
반복되는 위기 ‘화이트스완’ 시대
③ 위기의 희생양 중산층

지난달 5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만난 래리는 3년 전만 해도 안정적인 여생을 보장받은 직장인이었다. 20년 넘게 금융회사에서 일하며 중산층 뉴요커의 삶을 누렸다. 국외 채권 투자와 관련한 보조업무를 하는 데 불과했지만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고, 노후도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탄탄했던 일상은 금융위기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해고가 되니 갑자기 생계가 막막해지더군요. 한해에 1만달러가 넘는 보험료도 낼 수 없어 건강보험 혜택조차 받을 수 없게 됐답니다.” 그는 “월가는 금융위기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내고 있다는데 과연 우리 자녀들은 뭘 먹고 살아야 하느냐”고 한탄했다.

스스로를 ‘중산층의 나라’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던 미국에선 요즘 ‘부자 아니면 가난뱅이만 있다’는 자조가 넘쳐난다. 국가경제의 허리인 중산층은 줄어드는 일자리, 제자리걸음인 소득, 축소되는 사회보장에 갈수록 잘록해지고 있다. 계속되는 경제위기가 미국의 인구지도에서 중산층을 지우고 있는 셈이다. 미국 인구통계국이 지난 10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미국 중산층 가구의 실질소득은 4만9445달러(5594만원)로 1999년 5만3253달러를 정점으로 10년 넘게 줄어들고 있다. 중산층에겐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국 중산층의 몰락은 최근 들어 더욱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민간 연구기관인 센티어연구소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미국 가계의 평균소득은 경기가 회복 국면에 들어선 최근 2년 사이에 되레 6.8%나 줄었다. 금융위기 전후인 2007~2009년 소득감소율 2.4%보다 감소폭이 더 커진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25~64살)의 지난해 실질소득은 4만8000달러로 1979년 이후 30여년간 늘지 않았다. 단기계약직이나 시간제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미국 남성의 실질소득은 1970년 이후 28%나 떨어졌다.

미국도 스페인도 경제 커졌는데 중산층은 쪼그라들어


중산층 몰락 뒤엔 부자감세

경제위기 이후 뉴욕주
저임금 일자리 8만2천개 ↑
중·고소득 일자리는 25만개 ↓

중산층의 위기는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청에서 5년 동안 근무했던 아나는 얼마 전 정부가 공무원 수를 줄이면서 대량해고의 쓰나미에 휩쓸렸다. 지난 2일 만난 그는 정부가 운영하는 일자리센터에서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오는 길이었다. 임신 7개월인 그가 한달에 손에 쥐는 실업급여는 1000유로(150만원) 정도다. 예전에 비해 수입이 30%쯤 줄었다. 문화재 재건 관련 일을 하는 남편이 매달 1000유로가량을 벌지만, 최근엔 일감이 줄어 걱정이 태산이다.

더 큰 문제는 아이가 태어나고 실업급여가 끊긴 이후다. 집세로 매달 800유로를 내야 하는데 지금 형편으론 도무지 감당할 길이 없다. 바르셀로나에서 차로 1시간쯤 떨어진 부모집 근처로 이사갈 계획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거기서는 400~500유로면 월셋집을 구할 수 있다. 집세도 버거운 판에 외식은 이제 사치다. 친구들도 웬만하면 만나지 않거나 집으로 부른다. 그는 “지금보다 더 힘든 때는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도 스페인도 경제 규모는 과거보다 커졌는데, 왜 중산층은 쪼그라들고 있는 것일까? 경제성장의 과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워싱턴에 있는 미국 경제정책연구소의 분석을 보면 그 답이 명확해진다. 1979년 이후 미국 소득 상위 20% 가구의 소득은 49% 늘어났지만 중산층 가구는 겨우 11.2%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하위 20% 가구의 소득은 오히려 7.4% 감소했다. 소득이 대부분 부자들에게 흘러간 것이다.

금융자본의 심장부인 뉴욕주는 소득 불균형이 더 심각하다. 뉴욕주의 평균 가계소득은 2007년 이후 3년 동안 3.2% 줄었다. 반면 상위 1%는 뉴욕주 전체 소득의 35%를 가져갔다. 중산층 50%가 가져간 몫과 같은 수준이다. 미국이 황금기를 구가하던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산층과 빈곤층 가구의 소득증가율은 100%를 넘었다. 이 연구에 참가한 신희영 뉴욕재정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중산층 가구의 실질소득이 감소하기 시작한 건 로널드 레이건 집권기를 거친 1980년대 후반부터였다”며 “부자감세가 계속되면서 소득세율이 급격히 낮아진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부자감세는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미국 경제의 활력을 깨뜨렸다. 교육을 받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면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는 아메리칸드림은 실은 조세정책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만든 신화였다고 신 연구위원은 지적한다. 부의 재분배가 부자를 향해 역류하면서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사람은 더 많아졌다. 지난해 미국 빈곤가구(4인 가구 기준 연소득 2만2314달러 이하)는 15.3%로 2008년(13.2%)보다 늘어났다.

자산거품 붕괴도 중산층을 위축시키고 있다. 특히 집값 하락은 직격탄이 됐다. 집값의 80%까지 빚을 냈던 중산층은 집값이 떨어지자 파산하거나 저소득층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했다. 집을 가진 4명 가운데 1명은 실제 집값보다 많은 주택담보대출을 떠안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주택소유자의 20%가량이 주택담보대출을 갚을 수 없거나 갚을 의사가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집을 압류당한 중산층들은 부모집에 들어가 살거나, 친척끼리 모여 사는 새로운 세태를 만들고 있다.

중국과 신흥국의 성장, 개방으로 인한 미국 제조업의 붕괴, 노조활동 위축에 따른 실질임금 하락도 중산층의 몰락을 부추겼다. 노동 변호사이자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의 저자 토머스 게이건은 “소득 불균형 악화는 숙련도를 요구하지 않는 일자리에서 특히 심각하다”며 “미국 정부의 자유무역 정책으로 기업들이 공장을 국외로 이전하고, 지속적인 노조파괴 정책으로 노조의 교섭력이 약화된 것도 실질임금을 떨어뜨린 원인”이라고 말했다.

경제위기는 중산층의 기반인 좋은 일자리를 찌그러뜨렸다. 제조업·건설업·금융업의 일자리는 줄고, 청소나 보모와 같은 시간제 일자리는 늘어나는 일자리 양극화 때문이다. 뉴욕주의 경우 경제위기 이후 저임금 노동(연평균 4만5000달러 이하) 일자리는 8만2000개 늘었지만 중·고소득 일자리는 무려 25만개가 사라졌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미국과 같은 주주자본주의 체제는 단기간에 기업이윤을 많이 내야 한다”며 “이런 압박에 놓인 경영자들이 중간관리층 일자리를 많이 줄이면서 중산층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회원국 22개국 가운데 17개국이 1980년에 견줘 소득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중산층 붕괴라는 위협에 직면했다고 경고했다. 오이시디 보고서는 “소득 양극화 수준이 훨씬 일상적이고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며 “심지어 덴마크, 독일, 스웨덴 등 전통적으로 소득 불균형이 심하지 않은 나라도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는 중산층 붕괴의 신호탄인 소득 양극화 문제를 다시 뉴스의 중심부로 끌어들였을 뿐이다.

뉴욕/이재명, 바르셀로나/류이근 기자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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