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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그리스 청년들 ‘실업의 늪’
“월500유로 벌기도 힘들어”

등록 2011-12-06 21:54수정 2011-12-07 11:39

관광에 기댄 산업구조
위기·불황에 더큰 타격
* 500유로 : 77만원
그리스 아테네에 사는 에방겔리아 시가누(24)는 지난달 7일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1주일 동안 그리스에 가봤더니’란 제목의 영국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호기심은 얼마 가지 않아 불편함으로 변했다. 외과의사와 미용사, 운전사 등 영국인 3명의 눈에 비친 그리스는 온통 탈세와 부패로 채워진 ‘실패의 박물관’이었다. “그리스인들이 분에 넘치게 펑펑 돈을 쓰다가 부채위기를 맞았다고 조롱하는 거예요. 보다가 너무 속이 상했어요.”

그렇다고 시가누는 영국을 손가락질할 처지가 아니다. 그는 얼마 전 100유로(15만원)짜리 런던행 저가 항공표를 샀다. 일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어렵게 구한 표다. 요즘엔 영국도 상황이 좋지 않다지만 그리스에 비하면 천국이다. 그리스의 청년실업률은 영국의 2배가 넘는 43.5%에 이른다. 지난 3년 새 2배나 뛰었다. “뭐든 여기보단 낫겠죠. 영국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해도 한달에 1000파운드(180만원)는 버는데, 여기선 500유로(77만원) 벌기도 힘들어요.” 그는 2주 뒤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일자리를 찾아 그리스를 떠났거나 떠나려는 이들은 시가누만이 아니다. 전날 아테네에서 만난 국립과학기술대 4학년 아나스타시아(23)와 파나시스(24)도 각각 미국과 영국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파나시스는 “여기서는 대학을 나와도 월 600~800유로 받는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여론조사를 대행하는 ‘유로바로미터’는 최근 그리스 청년의 37%가 일자리를 찾아 다른 나라로 떠나고 싶어한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남은 청년들은 궁핍한 일상에 절망한다. 온종일 집에 처박혀 하는 일이라곤 컴퓨터 앞에 앉아 세계 곳곳의 회사에 전자우편으로 이력서를 보내는 게 고작이다. 밖에서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부모 집에 그대로 눌러앉는 ‘캥거루족’이 태반이다. 독일 비영리 공익기관인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은 지난 9월 ‘그리스 청년과 위기’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경제가 3년 연속 뒷걸음질치고 지난해부터 실시된 광범위한 재정긴축이 젊은층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욕심 많고 약삭빠른 기업들은 이 틈을 타 청년들을 공짜로 부려먹는다. 영국에서 언론학 석사까지 마친 시가누는 지난 6개월 동안 패션 잡지에서 근로계약서 없이 인턴으로 일했다. 임금은 한푼도 받지 못했다. 부당한 대우였지만 달리 길이 없었다. “잡지에 내 이름을 실어주는 조건이었어요. 이력서에 쓸 경력을 쌓을 기회였지요. 무급으로라도 일하거나 아니면 집에 가거나 둘 중의 하나였죠.”

위기 이전만 해도 그리스에서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은 아무리 못해도 매달 1000유로 이상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600~800유로로 확 줄었다. 그마저도 운이 좋은 경우다. 정규직을 구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청년들은 스스로를 ‘500유로 세대’라고 부르며 자조한다. 시가누는 “우리 부모 세대는 어렵게 시작해 중산층까지 올라섰지만, 우리는 중산층에서 태어나 밑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청년실업률 46% “스페인엔 희망 없어요”
계약직 1명 구인광고 며칠만에 9백명 운집
명문대 최우수졸업자도 일자리 못구해 ‘동동’
“졸업생 90% 취업했었는데 지금은 50% 정도에 불과”


사정이 1~2년 새 나아질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공공부문에서만 올해 3만명이 쫓겨났다. 2015년까진 모두 12만명이 추가로 감원될 예정이다. 불황을 겪고 있는 민간기업들 역시 사람을 뽑기보다는 내쫓기 바쁘다. 관광 등 경기변동에 민감한 서비스업 위주의 그리스 산업구조는 이런 상황을 가중시킨다.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하는 제조업이 그리스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남짓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꼴찌 수준이다.

청년들의 미래는 빚에 저당잡혔다. 그리스 정부는 파산(디폴트)을 피하기 위해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1740억유로를 지원받는다. 시가누 같은 젊은 세대가 갚아 나가야 할 빚이다. 빚을 덜려면 의사나 변호사 같은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지만 기대하기 힘들다. 시가누는 “그들이 그걸 원하겠어요? 그들은 정부보다 더 큰 권력을 갖고 있어요. 신문과 방송이 모두 그들 편이죠”라고 말했다.

시가누는 얘기하는 중간중간 담배를 손으로 말아서 피웠다. 공장에서 만드는 것보다 몸에 덜 해로워 좋다고 하지만, 실은 돈을 아끼기 위해서다. 아테네의 많은 청년들이 그처럼 담배를 직접 말아 피운다. 시가누는 담배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쉬곤 한다. “그리스는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섬이 많은, 참 살기 좋은 나라예요. 하지만 이제 이곳엔 희망이 없어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번역 프리랜서로 일하는 아나 클라베르(27)도 시가누와 똑같이 말했다. “이곳 스페인엔 희망이 없어요.” 그는 최근 런던에 가서 헤드헌팅업체와 기업체 등 200여곳에 이력서를 뿌리고 왔다. 스페인 최고 명문대 가운데 하나인 폼페우 파브라대에서 졸업 최우수 논문상을 타고, 영어·프랑스어 등 4개 국어에 능숙하지만 아직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누리아 소테라스 솔레 폼페우파브라대 취업센터장은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우리 학교를 졸업하면 90%가량이 취업했는데 지금은 50%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스페인의 청년실업률은 45.8%(9월 기준)로 그리스보다 높다. 스페인에선 젊은이들이 의무교육을 마친 뒤 대학으로 가지 않고 곧장 건설업이나 서비스업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경기 침체로 직격탄을 맞았다. 부동산 거품이 터지면서 건설업에서만 1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건물을 청소하는 요앙카(27)도 최근 4년 동안 일하던 직장을 잃었다. 지금은 정부가 운영하는 일자리센터에서 일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예전엔 매달 870유로를 받았지만, 요즘엔 600유로를 준다고 해도 감지덕지할 정도로 눈높이를 낮췄다.

최근 바르셀로나 구인정보 사이트인 ‘인포잡스’에는 경력 1년차 호텔 리셉셔니스트 계약직 1명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떴다. 연봉이 6000~1만2000유로에 불과했지만 불과 며칠 만에 900명 가까운 사람이 몰렸다. 임시직이 많은 스페인에선 흔한 풍경이다. 후안 라몬 콰드라도 알칼라대 교수는 “스페인의 임시직 비율은 유럽 평균보다 2배나 높다”며 “기업체가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는 구조가 청년실업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처럼 관광 외에 마땅한 산업기반이 없는 탓에 스페인도 위기의 충격이 컸다. 그래도 아테네에서 만난 파시우스는 스페인을 부러워했다. “스페인엔 세아트 같은 자동차 공장이라도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에겐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바르셀로나 아테네/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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