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재벌 불법계좌 만들어주고 거액 들락날락 방치
‘재벌소유은행’ 생기면 더 악화…“분리정책 강화 필요”
‘재벌소유은행’ 생기면 더 악화…“분리정책 강화 필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금지하는 ‘금산분리 원칙’ 완화를 주장하면서 금산분리 문제가 주요한 대선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가 공개한 ‘삼성그룹 차명계좌 실태’와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재산 형성 과정’ 등을 보면, 법으로 금산분리를 규정하고 있는 지금도 재벌이 사실상 금융산업을 ‘장악’하고 있으며 폐해가 심각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금산분리가 완화돼 재벌이 은행을 소유하게 되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 재벌 ‘하수인’ 된 은행=지금까지는 금산분리 완화의 가장 큰 폐해로 은행의 재벌 사금고화가 지적돼 왔다. 재벌들이 은행을 소유하게 되면 은행 돈을 마음대로 꺼내 쓸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삼성그룹 비자금 사건은 한발 더 나아가 재벌이 은행을 갖게 되면 계열 은행을 통해 비자금 조성과 자금 세탁 등 불법 행위를 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김 변호사의 공개로 드러났듯이, 우리은행은 삼성그룹이 불법 차명계좌를 개설하는 데 협조하고, 정체 불명의 거액이 들고나는데도 금융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묵인했다. 불법 행위를 한 삼성의 하수인 노릇을 한 셈이다.
삼성그룹은 지난 8월27일 새로 차명계좌를 개설해 17억원을 입금한 뒤 다음날 ‘삼성 국공채 신매수’ 자금으로 인출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는 전형적인 자금세탁 방식이다. 한 은행의 자금 담당 직원은 “자금을 세탁하기 위해선 자금 추적을 하지 못하도록 여러 은행들의 차명계좌에서 돈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는데 (삼성이) 그런 방법을 쓴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이 삼성그룹 소유가 아닌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만약 삼성이 직접 은행을 갖게 되면 비자금 조성·관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 제2금융권은 이미 ‘공모자’=삼성그룹의 금융 계열사인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등은 이미 삼성그룹의 불법 행위에 공범자로서 가담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들 금융 계열사가 1997~98년 이재용 전무의 재산 증식을 도왔다는 분석(<한겨레> 11월21일치 1·8면)이 나오고 있다. 당시 이들 계열사는 이 전무가 보유하고 있는 제일기획, 에스원, 삼성엔지니어링 등의 주식을 높은 가격에 매입해 줬다. 금융회사가 고객 돈으로 총수 승계 예정자의 재산을 불려준 셈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일부에선 재벌들이 과거에 비해 투명한 경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은행을 갖게 해도 문제 될 게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삼성 비자금 사건을 통해 그런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며 “오히려 금융감독당국은 재벌 소유의 제2금융권에 대한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 ‘재벌 은행’은 공정 경쟁 왜곡=재벌이 은행을 소유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 중 하나는 정보의 독점이다. 은행과 기업이 거래를 트게 되면 기업은 자신들의 내부 정보를 은행에 전해준다. 은행은 기업의 대차대조표·현금흐름표·감사보고서 등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비재무 정보도 받는다. 만약 특정 재벌이 은행을 지배하게 되면 경쟁 기업들의 각종 정보들을 한눈에 훑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은행의 임원은 “2000년 현대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맞았을 때 외환은행 등 채권단의 입김이 현대의 후계 구도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컸다”며 “만약 특정 재벌이 은행을 갖게 되면 그 은행을 이용하는 기업들은 그 재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한 은행의 임원은 “2000년 현대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맞았을 때 외환은행 등 채권단의 입김이 현대의 후계 구도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컸다”며 “만약 특정 재벌이 은행을 갖게 되면 그 은행을 이용하는 기업들은 그 재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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